‘빌려준 돈 못받았다’ 80대, 50대 여성 살해
여성의 아들도 공격…살인·살인미수 징역 18년
유족 “경찰, 보호의무 게을렀다” 국가 상대 소송
법원서 기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적절한 조치”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지난 2024년 5월, 서울 강남구 어느 아파트에서 한 80대 남성이 50대 여성과 여성의 아들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남성은 여성에게 빌려줬던 돈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 사건으로 여성이 숨을 거뒀고, 여성의 아들은 전치 8주의 상해를 입었다. 가해자인 80대 남성 A씨는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18년이 확정돼 현재 복역 중이다.
유족은 담당 경찰에게 살인 사건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소송 과정에서 유족은 “5년에 걸쳐 지속적인 협박, 감금, 주거침입, 스토킹 행위 등이 반복됐다”며 “경찰이 보호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빚 갚으라 독촉하다 살인…징역 18년 확정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912단독 이선희 판사는 B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지난 7월 22일 유족 측 패소 판결했다.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A씨는 지난 2008년께 B씨에게 수십억 상당의 돈을 빌려줬다. 2013년엔 빚이 47억원까지 늘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B씨를 상대로 민사 승소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A씨는 돈을 받지 못했다. B씨 개인 명의로 된 재산이 없었다. A씨는 범행 직전까지 금융기관에 상당한 이자를 부담하고 있었다.
A씨는 지난 2019년부터 2024년 범행 직전까지 10차례 이상 B씨를 찾아가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흉기를 들고 B씨 주거지 앞까지 찾아가거나, 차량에 올라타는 일이 반복됐다. 주거지에 무단으로 침입해 “오늘 돈 못 받으면 살해하겠다”며 2시간 동안 피해자를 감금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특수협박, 폭행치상, 주거침입 및 감금 등 혐의로 A씨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하지만 수사가 이뤄지는 사이 A씨가 B씨와 B씨 아들을 찾아가 살인 및 살인미수 범죄를 저질렀다.
A씨는 1·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 지난해 5월, 징역 18년이 확정됐다. 형사 재판부는 공통된 양형(처벌 정도) 사유로 “47억원에 달하는 돈을 받지 못하면서 채무를 독촉하는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며 “채무 관계에 따른 분노감이 있더라도 살인을 저지른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유족 “경찰관, 직무 게을리했다” 2억 5000만원 소송 제기
유족은 지난 2024년 12월,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유족 측은 “담당경찰관이 직무를 게을리 하는 등 위법한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했다”며 2억5000만원을 청구했다.
유족 측은 재판 과정에서 “A씨가 2019년부터 2024년에 걸쳐 지속적인 협박, 감금, 주거침입, 스토킹행위 등을 했다”며 “2024년 3월부터 A씨가 피해자의 생명·신체에 위해를 가할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담당 경찰공무원으로서는 보호해야 할 직무상 의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스토킹 행위에 관해 입건 없이 단순 귀가조치 하거나 불송치, 축소의율 했고, 적극적인 신변 보호조치가 아닌 소극적인 보호조치를 취하는 데에 그치는 등 의무를 고의 또는 과실로 게을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유족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법원은 맞춤형 순찰, 스마트워치 지급, CC(폐쇄회로)TV 설치 제안, 추가 혐의 적용, 경찰관 개인 휴대전화 번호 제공 등 경찰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유족 측이 주장하는 사정만으로 담당 경찰공무원의 조치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항 정도로 현저히 불합리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족은 “경찰이 스토킹처벌법상 보호조치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법원은 “경찰이 신청한 보호조치가 법원과 검찰에서 각각 기각된 적이 있었다”며 “당시까지만 해도 A씨와 피해자가 직접 마주친 적이 없고 주거지 근처를 배회한 것뿐 아니라 해당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경찰은 피해자에 대해 주거지 인근 맞춤형 순찰, 스마트워치 지급, CCTV 설치 등을 제안했다”며 “다만 피해자가 스마트워치를 조기반납하며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CCTV 설치를 거부했다”고 짚었다.
아울러 “담당 경찰공무원은 피해자에게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제공하며 A씨를 마주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다”며 “덕분에 실제 피해자가 경찰 개인 번호로 신고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유족은 “경찰이 추가적으로 스토킹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입건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했지만 법원은 “이는 A씨가 고인에 대해 보복 감정을 품는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A씨가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처벌된 전과가 없고, 80세가 넘은 고령이라 체격이 크지 않은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법원은 “당시 A씨가 고인에게 위해를 가할 잠재적 위험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신변보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긴 어렵다”며 “경찰이 이번 살인 사건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살폈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했을 때 법원은 “담당 경찰공무원은 인적·물적 능력의 범위 안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며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수사 당시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현저히 불합리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서 사후적으로 위법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경찰 측 대리 변호사 “현장서 묵묵히 헌신하는 경찰 노고 인정받길”
경찰 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로베리의 김민정 변호사는 헤럴드경제에 “이번 승소 판결이 현장에서 묵묵히 헌신하고 있는 형사·수사관들의 노고가 온전히 인정받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해당 담당 수사관은 피해자에게 개인 휴대폰 번호까지 제공하며 24시간 연락을 이어갔다”며 “추가 혐의를 입증하는 등 피해자 보호조치에 혼신의 힘을 다 한 점이 인정받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1심 판결에 대해 유족 측이 항소해 2심이 서울고법에서 계류 중이다.
notstr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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