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정의신 연극 ‘스미레 미용실’ 개막
1960년대 규슈 탄광촌 재일 한국인 소재
“사랑·가족의 고통은 지금도 통한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60년대 일본 규슈 탄광촌.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서 수미는 이발소를 운영한다. 수미의 꿈은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건 미용실을 여는 것. 그의 평범한 일상은 어느 날 탄광 폭발 사고로 뒤흔들린다. 상실과 이별이 찾아온 뒤에도,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면서도 사람들은 기어코 먹고 마시고, 웃고, 사랑하고, 싸우며 살아간다. 정의신(69) 극작가 겸 연출가가 20년에 걸쳐 이어온 ‘재일 한국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인 연극 ‘스미레 미용실’이다.
”‘재일 코리안’ 3부작으로 많이들 일컬어지는데요. 사실 처음부터 3부작으로 완성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쓰다 보니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재일 한국인에 관해 쓰게 됐어요.“
‘이를테면 들에 피는 꽃처럼’과 ‘야키니쿠 드래곤’을 통해 재일 한국인의 생명력을 무대 위로 펼쳐놓은 정의신 연출가의 ‘스미레 미용실’은 지난 2012년 일본 신국립극장(新国立劇場)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오는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 한국에선 처음으로 공개된다.
재일 한국인 2.5세인 정 연출가는 “60년대 일본 규슈의 탄광에 관한 이야기”이라며 “탄광의 비극을 담지만 한국 관객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1960년대 탄광 사고, 지금과 다르지 않아”
‘스미레 미용실’은 1960년대 일본 규슈 지역의 탄광촌을 서사의 중심축에 놓는다. 당시 일본은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 정책을 급격히 전환하던 시기였다. 대규모 해고와 안전 관리의 부재로 끔찍한 탄광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때다. 그는 규수의 탄광을 직접 찾아 취재하며 사고의 경험과 기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규수엔 사고 경험자의 가족과 친척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의미”이라며 “그 시절의 탄광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인원 감축, 재정 감축으로 인재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규수를 직접 돌아보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역사도 있다. 탄광에서 일했던 재일 한국인 노동자들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정 연출가는 “규수 지역의 광부들은 1970년대 오사카 박람회가 열렸을 때 그 활주로를 건설하는 노동자로 이동하게 됐다”며 “가난한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의 경제를 지탱했다는 새로운 발견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고 회고했다. 역사 안에서 희생자나 주변인으로 기억되던 사람들이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을 떠받친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정 연출가가 탄광 재일 한국인에 관해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결정적 계기였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역사를 품고 있지만, 극의 공기는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무대는 살아 숨 쉰다. 참혹한 비극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희비극은 정 연출가 작품의 큰 특징이다. 그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성(性)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의 가장 큰 욕구 중에 하나다. 탄광의 비극에 그것을 더했다”며 “희극과 비극은 평행선을 달리며 일치한다. 나의 비극이 타인에겐 희극으로 보이고, 나의 희극이 타인에겐 비극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의 다면적인 면“이라고 강조했다.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은 제비꽃에서 따왔다. 정 연출가는 “수미는 한국어로 제비꽃인데, 길바닥에 피어 아무도 몰라볼 때조차 열심히 자기의 꽃을 피우며 살고 있다는 것에서 감명받았다”고 귀띔했다.
연출가의 시선은 배우들을 통해 보다 선명해진다. 스미레 미용실을 운영하며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주인공 ‘수미’ 역의 최지연은 “밖에서 볼 때는 비극으로 보이지만, 이 안에서 살아가는 수미의 세상은 희극”이라며 “역사 속 영웅이나 투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굴곡과 절망 속에서 꿈과 희망을 놓지 않는 제비꽃 같은 수미의 모습이 숭고하게까지 느껴졌다”고 말했다.
수미의 남편이자 숱한 민폐를 끼치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나루히로’ 역의 서동갑 역시 “나루히로는 시대는 다를지라도 지금의 아버지, 가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며 “상황이 어떻든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디아스포라 넘어선 ‘보편적 역사’
20년에 걸쳐 작품을 써오며 그가 도달한 곳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의 역사였다. 그는 ‘야끼니꾸 드래곤’을 처음 쓸 당시를 돌아보며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작은 세계를 재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적으로 볼 땐 이민의 이야기이자 현대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정 연출가의 작품은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을 올리는 출발점이지만, 작품이 바라보는 곳은 국적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인간의 감정이다. 실제로 미국과 호주에서 ‘야끼니꾸 드래곤’ 리딩 공연을 했을 당시 현지 관객들에게서도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반응을 들었다고 그는 귀띔한다.
‘스미레 미용실’이 1960년대 탄광 이야기임에도 2026년의 관객과도 공명하리라는 믿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정 연출가는“탄광 이야기가 6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치부되면 그걸로 끝나버린다”며 “변하지 않는 사랑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 사회에서 점점 쇠퇴하고 있는 요소다. 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은 현대사회에도 통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루히로의 동생 ‘히데히로’ 역의 김동원 또한 “1960년대에 멈춰 있는 이야기로 관객분들이 바라봐 주신다면 그걸로 끝나버리겠지만,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 크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봤다.
일본에서 태어나 1987년 극단 신주쿠 료잔파쿠를 창립해 극작을 시작한 정의신은 영화 ‘달은 어느 쪽에서 뜨는가’의 각본으로 마이니치 영화콩쿠르 각본상과 키네마 준보 각본상 등을 수상하며 영화계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그가 한국 관객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대표작이다. 2008년 한일 공동제작으로 국내에 소개된 뒤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에선 재일 한국인의 이야기가 중요한 축을 이루나, 이것만으로 정의신 연출가의 작품을 모두 설명할 순 어렵다. 가족의 상처를 다룬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 재일동포 사회 내부의 폭력과 가족을 다룬 ‘피와 뼈’, 전쟁과 식민의 기억을 다룬 ‘적도 아래의 맥베스’, 조선학교를 둘러싼 전후 일본사와 아이들을 다룬 작품 등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역사를 넘어 그 역사를 견뎌내는 개인이다. ‘스미레 미용실’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하나의 결산처럼 읽힌다.
정의신은 “하나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역사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들(재일한국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하고, 나는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각자 열심히 살아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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