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다. 집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생필품을 사러 나선 시장에서도 나와 남의 교류는 이어진다. 태어나 배우고 일하다 은퇴하기까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다만 이 관계들이 모두 같지는 않다. 가족은 혈연이, 시장은 이해가, 국가는 권력이 묶어낸다. 이러한 메커니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공공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영역, 그것이 시민사회일 테다.
우리나라에 이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레와 품앗이를 통해 일감을 나눴고, 계는 위험을 분산했으며, 향약은 마을의 규범을 자율적으로 관리했다. 국가가 닿지 못하는 자리를 주민이 스스로 메운 상부상조의 결사체였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전통과 정신이 근대 시민사회로 온전히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맥락과 발전국가의 산물로서의 한국 시민사회를 생각해 본다. 이에 우리의 시민사회 역사는 다소 슬픈 모습이다. 식민지 시기 자발적 결사는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 되었고, 1970년대 관 주도 지역개발사업은 마을의 협동 정신을 국가 시책의 통로로 재편했다. 물론 이러한 시민 운동의 역할은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다만 ‘누가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였느냐’의 측면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스로 조직하던 경험이 위에서 조직되는 경험으로 대체된 우리 시민사회의 첫 번째 왜곡은 여기서 비롯한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저항’이었다. 1987년 이후 경실련(1989), 환경운동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이 잇따라 시민사회의 싹을 틔웠고, 2000년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으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뭐든지 빠른 우리나라의 특성이 반영된 압축적 성취였다. 2016년 광장에서도, 2024년 12월의 밤에도 우리 시민의 힘은 어김없이 작동했다. 다만 감시와 비판을 존재 이유로 삼아 출발한 탓에, 그 힘은 정치적 국면에서만 선명해진 것 역시 사실이다. 일상의 돌봄과 소소한 생활 문제를 공동체가 함께 감당하는 근력은 그만큼 자라지 못했다. 회원의 회비와 자발적인 공동체 형성보다 활동가의 헌신이 조직을 지탱하는 구조도 그때 굳어졌다. 두 번째 왜곡이다.
영미권이 부러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에서 미국은 무슨 일이든 결사를 만들어 해결한다고 하였다. 병원과 학교, 감옥이 그렇게 세워졌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미국의 결사체는 국가와 싸우며 태어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하지 않는 일을 대신하며 자랐다. 영국 역시 1998년 정부와 자원 부문이 협약(Compact)을 맺어 관계의 규칙 자체를 문서로 남겼다. 정권이 바뀌어도 판이 흔들리지 않는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시민사회의 자생력이 그 뿌리다. 반면 한국의 시민단체는 상당수가 보조금에 기대어, 정부와의 거리가 곧 생존의 변수가 된다. 2023년 등록 요건 전수조사로 등록 단체가 한 해 10.8% 줄어든 일은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시민단체의 힘, 시민들의 결사 밀도는 민주주의의 예비 전력이다. 평소에 두터워야 위기에 쓸 수 있다. 배울 것은 조직의 형태가 아니라 작동 방식이다. 재정의 무게중심을 보조금에서 회원과 기부로, 광장에서 생활권으로. 우리는 우리 시민사회 책임의 방향과 관계성을 다시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돌봄과 주거, 지역 소멸처럼 국가가 홀로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이야말로 두레와 계가 원래 서 있던 자리다. 끊어진 전통을 잇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시민사회를 광장의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제도로, 스며드는 숨결로 온전히 우리가 뜻을 세워야 할 것이다. 사회의 가치와 성장 또한 이러한 힘에서 비롯된다.
이윤진 건국대 건강고령사회연구원 교수
realbighea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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