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과학철학사에 ‘부지깽이 스캔들’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있다. 1946년 10월 25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당시 44세의 떠오르는 학자 칼 포퍼가 당차게 강연을 할 때, 그 무렵 ‘철학의 신’으로 불리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당시 57세)이 포퍼를 향해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위협했다. 그 강연회의 좌장은 버트란드 러셀이었다. 지금까지도 위대한 학자로 남아 있는 3명이 한 자리에 모인 것도 흥미로운데, 이 같은 촌극이 벌어졌으니 화제가 될 법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이 나올 정도였다. # 얘기 나온 김에 하나 더. 세계 금융계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고, 아직도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하는 조지 소로스(87)는 영국의 런던정경대학에서 포퍼를 만나 그의 ‘열린 사회’ 개념에 큰 감동을 받았다. 크게 성공한 이후인 1979년부터 전 세계에 열린사회재단(Open Society Foundation)을 설립해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를 전파하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포퍼가 얼마나 위대한 학자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포퍼는 평생 ‘합리성’에 주목했고, 반증주의에 입각해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한 열린사회를 꿈꿨다. 이른바 비판적 합리주의다. 그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비판으로부터 닫혀 있기 때문에 사이비과학이라고 비판했다. # 스포츠 얘기를 하려면서 생뚱맞게 포퍼를 찬양한 것은 소심한 이유가 있다. 인기가 높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좀 비판을 하려고 하는데, 요즘은 ‘문통’을 건드리면 내용을 떠나 그 행위 자체로 욕을 해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보매체의 기자들도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조리돌림을 당하니 스포츠글 따위를 쓰는 사람은 겁이 나지 않겠는가? 어쨌든 언론에 크게 보도됐던 지난 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세계태권도선수권(무주) 개회식 축사, 즉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 등 남북 체육교류 제안는 좀 따져볼 문제가 있다. # 먼저 잘 알려지지 않은 현장 상황이 하나 있다. 23회째 맞는 세계태권도선수권 사상 개최국의 국가원수가 참석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최초다. 북한의 태권도시범단과 함께 장웅 IOC위원이 참석했으니 나름 의미가 있다. 스포츠에 관심을 표한 것 자체도 좋다. 그런데 조금 의혹이 인다. 행사를 주최한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는 문재인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다. 경희대 동문이고, 심지어 태권도계에서는 2004년 그가 보선으로 WTF총재가 될 때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 그래서일까, 김운용 WTF창설총재(전 IOC 수석부위원장)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24일 행사의 의전에서 뒷전으로 밀린 것을 두고 뒷말이 나왔다. 체육원로에 대한 푸대접, 라이벌 견제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김 전 총재는 태권도계에서 조 총재와 사이가 좋지 않고,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를 공개지지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조정원 총재가 자신의 꿈인 IOC위원에 도전하다면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 있다. 체육계 원로답지 못한 김운용 전 총재의 정치적 행보나 이기흥 회장의 IOC위원 셀프추천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핵심은 혹여 문재인 대통령이 사적인 친분을 중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는 권력을 잡았다고, 인기가 높다고 정당화될 수 없다. 국정농단 세력에게 된통 당한 우리 국민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의혹 자체가 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두 번째는 내용의 아쉬움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단일팀, 남북 선수단의 동시입장은 실현가능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발상 자체가 신선하지 않다(북한은 현재 단 1명도 평창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깊은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미 탁구와 축구에서 남북단일팀을 결성해 국제대회에 나간 바 있고, 남북 동시입장은 9번이나 해봤다. 그런데 냉정히 따지면 이는 실질적인 남북체육교류 진증보다는 일회성 과시용 이벤트에 그쳤다. 한국에 보수정부가 들어선 이후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역사에 묻히고 만 것이다. 오히려 체육전문가인 안민석 의원의 경평축구(1929년 시작, 서울시가 노력 중) 부활 제안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 남북체육교류는 IOC 등 제3자의 조력이 필요한 국제적 메가스포츠이벤트보다, 남북이 합의만 하면 바로 실현할 수 있는 자체교류가 더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 국제정세가 미묘한데 남북체육교류를 하면서 국제적으로 떠벌일 필요 없이 실속 있게 추진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경평축구, 통일농구 등 사례도 있고, 실질적으로 남북체육인들에게 도움이 될 종목들이 많다. 국내 실업대회에 북한의 특정팀이 출전하거나, 역으로 한국선수들이 북한대회에 출전해도 좋다. 큰 격차가 나지 않고, 양쪽 모두 어느 정도 경기력을 가진 종목이라면 실현가능성이 높다. 대상선수도 꼭 성인대표팀 수준을 고집할 필요 없이 청소년이나 생활체육이라도 무방하다. 이렇게 해야 효과가 있다. # 세 번째는 스포츠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중국, 미국과 베트남이 핑퐁외교로 평화를 이뤘다”(24일 문재인 대통령). “정치가 스포츠 위에 있다. 정치환경이 잘 마련돼야 스포츠 교류도 편해진다. 스포츠가 (남북관계 개선의) 기폭제는 될 수 있어도 기초나 저변은 되지 못한다”(27일 장웅 IOC위원). 어느 쪽이 설득력이 있는가? 어느 쪽이 뜬구름을 잡으려하고, 어느 쪽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핑퐁외교는 당시 중국과 소련의 불화 등 정치, 경제적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럴 만한 외부요인이 성숙했기에 핑퐁외교가 나온 것이지, 미국에서 별로 중요한 스포츠도 아닌 탁구가 미중외교를 이끈 것은 결코 아니다. 청와대가 스포츠를 잘 모르면 배워야 한다. 미국은 61년 전인 1956년에 대통령직속스포츠위원회(PCPFS, President's Council on Physical Fitness and Sports)를 설립했다.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하면, 결과도 그럴 것이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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