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만 대접하는 은행 아닌 중산층 자산관리 주력 무리하게 지점축소 않고 고객편의 먼저 생각 첫 한국인 CEO 박종복 SC제일은행장
박종복 SC제일은행장(62)을 최근 서울 종로구 공평동 본사 10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커다란 회의 테이블이나, 위엄 있는 소파, 널찍한 책상 등을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4평 남짓한 공간에 은행 VIP고객 상담 창구 정도의 있을 법한 책상에 박 행장은 앉아 있었다. 컴퓨터와 서류더미 등을 제외하면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책상은 비좁았다. 어른 팔 길이쯤 되는 책상 폭 너머 의자가 두 개 놓여 있다. 앞에 앉으면 박 행장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행장실은 10층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나머지 절반이 임원들 방이었다. 하긴 부장들도 저마다 방이 있던 시절이었다. 뉴브릿지캐피탈(NBC)에 경영권이 넘어간 후 모든 게 바뀌었다. 행장 방 하나 남기고 직원들에게 돌려줬다. 임원들도 해당 부서가 있는 층으로 모두 내려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쓸 데 없이 (방이) 컸던 것 같다”
영국 본사 2인자인 그룹 최고재무관리자(CFO)의 사무실도 박 행장실 3분의 2 정도 크기라고 한다. 그룹 이사회 의장 방도 이보다 작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SC제일은행은 행장 방도 좁고, 외형도 시중은행의 5분의 1이다. 하지만 ‘넓고’ ‘큰것’들도 있다.
우선 고객 폭이 넓다. SC제일은행의 자산관리(WM) 시장 공략법은 씨티은행과 정반대다. 씨티은행은 상위 자산가 고객에 집중한다면, SC는 보다 대중적인 시각에서 WM 시장에 접근한다. 100세 시대에는 자산가들뿐 아니라 일반 중산층 고객들도 자산관리가 필요하다는 게 박 행장의 철학이다.
씨티은행은 지점을 줄이는 데신 거점 프라이빗뱅커(PB) 센터를 대형화하지만, SC는 있던 PB센터를 쪼개 각 영업점에 PB를 보내는 상반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일반 고객들이 더욱 쉽게 WM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공격적인 점포 축소는 없다. 자산 300조원의 국내은행이 1000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다면 60조원인 우리는 250개면 충분하다. 이 비율을 유지하겠다”
다음으로 기업대출 비중이 크다. 안전한 가계대출에만 집중하는 전당포식 영업을 한다는 비판을 하기 어려운 곳이다. SC제일은행은 전체 수익의 60%가 기업금융에서 나온다. 국책은행을 제외하면 은행권에서 단연 최고 비중이다. 특히 국내 기업의 해외 신흥시장 진출을 돕는 데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SC그룹이 아시아나 중동 등 옛 영국 식민지였던 신흥국에 모두 진출해 오랜 기간 튼튼히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예전 현대차가 인도 첸나이에 공장을 건설할 때 인도 SC은행은 물론, 한국 SC은행 직원이 ‘코리안 데스크(Korean Desk)’로 나가 공동으로 자금중개를 하는 등 협업(co-work)을 한 사례는 유명하다. SC은행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태국 등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SC제일은행은 올 상반기에만 영업이익 2490억원, 순이익 1942억원을 기록했다. 작년 연간 동안 번 것보다 많은 돈이다. 이 추세면 2009년 기록을 넘어 설립 88년 이래 최고실적 달성도 가능할 수 있을 정도다. 다른 곳들처럼 안전하고 쉬운 것만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기록적인 실적이 가능했을까?
외환위기 전만해도 제일은행은 국내 최대은행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기업금융의 강자였다. 돈줄을 쥐고 있던 대기업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부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8년 2조6149억원, 1999년 1조47억원의 적자를 내고 미국계 사모펀드인 뉴브릿지캐피탈에 매각된다.
하지만 사모펀드 답게 NBC는 2005년 영국 스탠다드차타드(SC)에 경영권을 판다. 이후 중국발 경제특수와 부동산 등 자산시장 활황 덕분에 2009년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자산과 실적이 함께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제일’이란 브랜드까지 버렸지만 실적은 좀처럼 개선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제일’을 뗀 이듬해부터 경영이 더 악화되기 시작했고, 2014년에는 적자로 돌아섰다. 제일은행 해외매각 이후 첫 적자였다. 영국 본사는 소매금융을 총괄하던 박종복 본부장을 최고경영자로 발탁한다.
제일은행이 외국계 은행이 된 이후 16년만에 첫 한국인 행장이다.
보통 적자가 나면 서둘러 이를 벗어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만 박 행장은 반대로 행동했다. 박 행장은 즉각 구조조정에 나선다. 과거 두 차례의 구조조정은 외국인 주도 아래 이뤄졌지만 이번에는 35년차 토종 ‘제일맨’이 주도했다. 취임 첫해인 2015년 적자는 전년대비 배 이상 불어났다. 강력한 구조조정 덕분이었다. 당장의 적자를 피하기 보다는 적자를 내는 구조를 도려냈다. 지점을 줄이고 감원에 들어갔다.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동시에 박 행장은 ‘제일’ 브랜드 회복에도 공을 들였다. 대주주의 잦은 변경과 실적악화, 구조조정으로 어느 때보다 직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직원들의 자부심은 물론, 소매금융에서 고객들과 친밀도를 높이려면 ‘제일’이란 이름이 행명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박 행장은 끈질기게 본사를 설득해 ‘제일’ 브랜드를 되살렸다. 지하 창고를 뒤져 서류 더미에 묻혀 있던 1929년 당시 은행업 허가증(라이센스)도 찾았다. 먼지 가득한 전임 행장들의 사진도 다시 꺼내 접견실에 함께 걸었다.
“제일은행은 조흥ㆍ상업은행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은행이다. 지금도 이름이 쓰이는 은행으로는 제일은행이 최고(最古)다. 상호명을 되찾은 것은 직원들 사기 진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2015년 내내 치열하게 진행된 구조조정 덕분에 지난 해에는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올해엔 사상 최고실적을 노릴 정도가 됐다.
전당포식 영업도 하지 않고, 고객 접점을 더 강화하는 SC제일은행의 행보는 문재인 정부에서는 칭찬을 들어 마땅한 행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박 행장은 은행에 지나친 공공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며 선을 그었다. SC가 기업금융 비중이 높은 이유도 ‘본업을 잘하기’ 때문이지 ‘공공성’ 때문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시대가 변해도 근본적으로 고객의 자산을 위탁 받아 사업하는 은행의 기본 구조는 변할 수 없다. 경제개발 시기 은행이 자금중개의 공적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최근 정부에서 스타트업 기업이나 벤처, 기술력이 있는 기업들을 지원하라고 강조하지만, 사실 은행 입장에서는 어렵다. 10개 실패하더라도 1개만 성공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벤처 업계를 지원하고자 은행이 나설 수 없다. 보수적인 고객들이 돈을 맡긴 취지에도 어긋난다. 이는 은행이 아니라 벤처캐피탈이 해야 할 역할이다”
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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