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회복’ 돈 풀면 재건축만 활활 규제가 호재를 못 이기는 ‘악순환’ 강남 재건축 7만6000가구 대기중
유동자금 생산적인 곳으로 유도 벤처·중기등 혁신산업 육성하고 부동산 안정·대체시장 활성화를
부동산 시장에는 이른바 ‘10년 주기설’이 있다. 10년을 주기로 시장이 침체와 활황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로 침체했던 시장이 2000년대 초중반 무서운 기세로 폭주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로 다시 한동안 식어들었다 2014년 무렵부터 재차 뜨거워지자 붙은 표현이다.
이에 현재 시장 조건은 10여년 전 참여정부 때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지난 정부에서 경기 부양을 목적으로 각종 부동산 규제를 완화했고, 시중에 많은 자금을 풀어 이제 고삐를 잡아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그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 역시 같은 인물이다. 참여정부에서 강도 높은 부동산 규제책을 주도했던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이다.
그러나 10년만에 돌아온 규제론자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김 수석은 역대 최고 강도의 부동산 대책이라는 ‘8ㆍ2 대책’을 내놓은 다음날, 참여정부 당시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던 원인으로 ‘과잉 유동성에 대한 이해 부족’을 꼽았다. 세계적으로 넘치는 유동성이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시장에 거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분석이었다.
실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시중 유동성은 크게 늘어났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 600조원 수준이었던 우리나라의 단기유동자금은 올해 7월 기준으로 987조원에 이른다.
문제는 경기 부양을 위해 풀었던 유동성의 상당수가 생산적인 산업이 아닌 부동산으로 흘렀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예금취급기관 산업별 대출액’을 보면, 올해 9월 기준 대출잔액은 1036조6000억원으로 이 가운데 18.9%인 195조7000억원이 부동산 ㆍ임대업에 쏠려있다. 5년 전인 2012년 9월의 대출잔액은 797조3000억원, 부동산ㆍ임대업 대출액은 104조원(13%)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늘어난 대출액(239조300억원)의 38%인 91조7000억원이 부동산으로 쏠린 것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주요 산업 가운데 반도체나 석유ㆍ화학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혁신을 보여준 곳을 찾기가 어렵다”며 “부동산은 실물이 있고 떨어지지 않는 지역이 비교적 뚜렷하기 때문에 주식이나 외환시장보다 투자 성공 확률이 높아 자금이 쏠렸다”고 말했다.
어찌보면 부동산이야말로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큰 혁신의 기대감에 들떠 있었던 산업이다. 지난 정부에서 아파트 재건축 규제를 줄줄이 완화하면서 노후 아파트가 새 아파트로 쉽게 탈바꿈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현재 재건축 대상이 되는 아파트는 주로 1970~8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현재의 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에 만들어져 현재의 주거에 대한 눈높이엔 못 미친다. 재건축이 된다면 40여년을 건너뛴 주거환경의 혁신이 한 번에 이뤄진다. 수도꼭지에 주기적으로 녹물필터를 갈아야 살 수 있는 집에서, 꼭대기에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수영장을 갖춘 집으로 변신한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11월 기준 재건축을 추진 중인 단지는 서울 강남에만 81곳, 7만6000여 가구다. 막대한 돈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서울 전체 집값이 8% 상승하는 동안 재건축은 12.4% 상승했다. 초강력 규제가 줄줄이 도입된 현재도 재건축 예정 단지의 상승세는 여전하다.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는 “재건축이 먼저 오르면 인근 단지들도 ‘갭 메우기’ 식으로 따라 오른다”며 “규제가 호재를 완전히 누르지는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빚내서 집사기’를 장려한 것도 부동산에 많은 자금이 쏠리게 한 원인이다. 정부는 2014년 담보인정비율(LTV)ㆍ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대출 규제를 완화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08~2014년 줄곧 횡보 혹은 하락하던 서울 집값은 2014년 이후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격이 부풀려진 자산은 또 다시 담보로 잡혀 여신의 팽창을 가져오고, 다시 자산의 가격을 올리는 확대 순환으로 이어졌다.
과잉 유동성을 제어해야 집값을 잡을 수 있다는 김수현 수석의 판단은, 최근 일련의 정책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정부는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LTV와 DTI를 낮췄고, 신(新)DTI, 임대수익 이자상환비율(RTI)을 도입하는 등의 대출 규제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 “빚내서 집사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까지 나온다.
대신 정부는 시중의 유동자금이 생산적인 곳으로 흐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른바 ‘생산적 금융론’이다. 부동산처럼 손쉬운 대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벤처ㆍ중소기업 등 혁신산업에 돈을 빌려 주라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부동산 불패 신화가 유동성을 끌어모아 다시 스스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부동산 시장의 안정과 대체 시장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과제가 모두 달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훈 기자/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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