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사외이사 대란’이다.
매년 정족수 부족으로 대규모 부결 사태가 속출했던 주주총회 현장에 또 다른 혼란이 예고됐다.
최근 정부가 제시한 상법 시행령 개정안은 ‘해당 기업에서 6년 이상 사외이사로 재직했거나 계열회사까지 포함해 9년 이상 재직한 사람’은 사외이사로 재선임할 수 없도록 못박았다. 현재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의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개정안은 공포되는 즉시 시행된다.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불과 넉 달 앞두고 상장사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상장사들은 벌써부터 ‘사외이사 구인 대란’을 기정사실화한 분위기다.
2017년 말 ‘섀도보팅’(shadow voting·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면 예탁결제원이 참석주주의 찬반 비율에 맞춰 대신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이 폐지된 이후 상장사는 정기주총 때마다 정족수 부족으로 안건 부결에 시달렸다. 특히 대주주 의결권이 3%로 제한되는 감사(위원)선임안이 매번 벽에 부딪혀 애를 먹었다.
안건 부결이 ‘예고편’이었다면 사외이사 구인난은 주총 대란을 절정으로 몰고 갈 ‘본편’이 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한국상장사협의회 분석에 따르면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코스피·코스닥 시장의 12월 결산법인 1939개사(금융사 제외) 중 566개사가 내년 주총에서 사외이사를 새로 선임해야 한다. 사외이사 숫자로 따지면 총 718명이 물갈이 대상이다.
우리나라 사외이사 인력 풀 자체가 극히 협소한 점을 고려할 때 상장사들은 당장 후보군을 꾸리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한다.
상장사협의회나 코스닥협회는 ‘사외이사 인력뱅크’라는 이름으로 자체 풀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상장사들의 활용도는 높지 않다. 상장사협의회 인력뱅크에 등록된 인원은 총 1364명이지만 767명(56%)이 경상계열 전공자다. 공학(162명)이나 의약(4명) 전공자는 극히 소수다.
코스닥협회도 마찬가지다. 총 268명의 등록인원 중 공학과 의약 전공자는 각각 35명, 6명에 불과하다. 최근 주식시장에 정보기술(IT) 업종이나 제약·바이오 업종의 기업들이 대거 진입하고 있지만 사외이사진을 꾸리기엔 여전히 환경이 녹록치 않은 셈이다.
주총일까지 몇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독립성과 전문성을 모두 갖춘 우수한 사외이사를 찾기에는 무리라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다년간 재직하면서 쌓은 전문성을 활용할 기회를 차단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중소기업들은 더 다급하다. 내년 교체대상 사외이사 중 85.7%(615명)가 중견, 중소기업에 집중돼 있다. 사외이사 제의를 받은 이들은 이왕이면 보수도 짭짤하고 인지도도 높은 대기업행을 택할 것이 자명하다. 중소기업으로선 ‘괜찮은’ 사외이사 한 명 모시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 앞으로 다가온 ‘사외이사 물갈이 압박’은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쓸만한 후보를 찾더라도 또 하나의 난관이 남아 있다. 시행령 개정안에는 사외이사 후보자의 세금 체납사실 등의 전과를 주총 전 주주들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독립성과 전문성에 더해 도덕성까지 사외이사의 주요 자격요건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상황에서 선뜻 응할 사람이 있을까.
결국 주총일에 맞춰 급하게 후보를 찾다보면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사외이사를 꿰차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한 제약·바이오 기업은 과거 사외이사진에 군 장성 출신 인사를 포함해 전문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개정안이 시행되면 전공과는 무관하게 대학교수들의 사외이사 진출만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 거수기 역할만 할 뿐 경영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러한 독립성 결여 문제가 결국 사외이사 임기 제한이라는 정부의 초강수를 자초한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개정안은 초유의 사외이사 대란이라는 또 다른 리스크를 안고 있다. 당장 새 인물을 찾아야 하는 상장사들로선 구인난 속에 자칫 독립성도, 전문성도 모두 결여된 ‘묻지마 선임’의 함정으로 빠질 가능성만 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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