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위기가 아닌 것 같아 더욱 두렵습니다. 정유사들이 회사채, 기업어음(CP) 등을 경쟁적으로 발행하는 건 보유 현금이 없어 부도가 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유업계가 역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단순한 실적 급락의 수준을 넘어선다. 연간이 아닌 분기 손실이 조단위에 이를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국내 정유4사는 초긴장 상태다. 글로벌 수요 급감→ 재고 폭증→ 보유 현금 감소→신용등급 하락→ 자금조달 애로 등의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며 사면초가의 국면에 내몰리고 있다. 정유업계는 유류세 유예와 석유저장시설의 추가 확보에 정부가 나서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국제 유가 마이너스…글로벌 수요 감소 장기화 신호=21일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유가가 0달러 이하로 폭락하는 기현상이 벌어지자 정유업계는 바로 사색이 됐다. 마이너스 유가는 돈을 주면서까지 현물을 넘기겠다는 의미다. 분명 정유업계에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인 요인이지만 마이너스 유가가 상징하는 바는 글로벌 수요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궁극적으로는 대형 악재라는 설명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마이너스 유가는 한 마디로 아무도 사갈 사람이 없으니 돈을 얹어주면서까지 가지고 가라는 말과 같다” 며 “보다 큰 문제는 6월 인도분 선물가격까지 급락하는 추세를 볼 때 유가 급락의 문제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 수요 부진은 마이너스의 정제마진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정제마진은 3월 셋째주 배럴당 -1.9달러로 떨어진 이후 지속적으로 음의 영역에 있다. 다시 말해 공장을 돌려 팔아도 손해가 나고 있다는 의미다. 인건비나 기타 고정 비용을 감안할 때 국내 정유사들의 손익분기점(BEP)은 배럴달 4달러로 추산된다. 상황이 이렇자 정유4사의 1분기 손실 규모는 2.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길도 막히자 재고 급증…현금 고갈에 최악의 자금난=자동차와 항공 등에서 두드러지는 글로벌 수요 감소는 정제된 석유제품들의 수출길도 가로 막았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수입해 정제한 석유제품의 대략 절반 가량을 내수용, 남은 절반은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 수요국들의 경제가 멈춰서면서 석유제품 수출에 급제동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내수 수요 마저 부진해지자 결국 정유사들은 급증한 재고 부담을 떠안기에 이르렀다.
이는 다시 보유 현금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장기 계약에 따라 원유 구매 대금은 산유국에 꼬박꼬박 지불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이같은 정유업계의 중첩된 악재를 반영해 잇따라 정유사들의 신용등급을 강등하고 있다. 정순식·정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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