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갚아야 하는가? 물론이다. 채권채무계약은 경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다. 약속에 따라 원금과 이자가 상환될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다면 경제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채권채무계약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왔다. 역사를 살펴보면 오랜 기간 채무불이행자를 노예로 삼아 인신을 지배하고 노동을 강제해 채권을 회수할 권리를 채권자에게 보장했다. 채무자로서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장치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인권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채무노예제도는 오래전에 종말을 고했다. 채무불이행자에 대한 처분도 채권자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채권자와 채무자 간 이해관계의 균형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채무불이행자에 대한 처분과 관련되는 제도를 설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안 갚는 자와 못 갚는 자의 구분이다. 안 갚는 자에 대해서는 계약관계 보호를 통해 경제 질서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못 갚는 자에 대해서는 동일한 조치가 채권자의 권리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채무자의 경제활동을 가로막아 채권자와 채무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문제는 채무자 본인을 제외하고는 안 갚는지 또는 못 갚는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국가에서는 채무자에 대한 적절한 압박을 가함으로써 건전한 신용질서를 유지하되, 채무자의 경제활동을 심각하게 저해해 자원 배분의 왜곡이 발생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제도를 설계하고 있다. 우리의 제도는 그간 여러 차례에 걸친 개선 노력에도 여전히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방지에 지나치게 경도돼 채권자의 권리 확보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 예로 장기 연체 채권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강력한 채권추심의 압박에도 1000만원도 안 되는 채무를 10년 넘게 연체하고 있다면 안 갚는 것일까, 못 갚는 것일까? 답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대부업체를 중심으로 소액 장기 연체채권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채무불이행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신용질서 수호라는 관점에 과도한 무게를 두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채권자와 채무자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9월 초 정책 당국은 개인 부실 채무의 신속한 조정을 통해 채무자의 정상적인 경제활동 재개를 촉진하고 추심업자의 과도한 추심행위를 규율할 목적으로 소비자신용법 제정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다. 매우 반갑고 환영할 만한 발표다. 발표에 따르면 소비자신용법은 상환능력 감소를 경험한 연체채무자가 채권금융회사를 대상으로 채무 조건 변경을 요구할 수 있게 채무조정요청권을 부여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채무조정교섭업을 도입하며, 연체가 지속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가중되는 채무자의 부담을 경감하고, 채권추심업자의 과잉 추심행위를 제한하는 것과 함께 과잉채권 추심의 유인을 제거하기 위해 부실채권 추심시장 구조를 개편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간 해결이 필요하다고 지적돼온 논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소비자신용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채무불이행자에 대한 처분과 개인 부실채권시장 규율의 틀을 근본적으로 개편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일하는 국회를 천명한 정치권이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는지를 지켜볼 일이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