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천사도 악마도 없다. 경우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리 부딪치고, 저리 휩쓸리는 우리네 모습이다. ‘유나의 거리’는 사람을 닮았다. 대한민국의 ‘아랫도리 인생’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에 ‘사람’이 있었던 탓이다. 어느 시인은 ‘시궁창에도 꽃은 핀다’ 했다.
50회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대략 1부~15부까지는 각 캐릭터들이 가진 사연 설명이, 15~40회까지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애환을, 40회 이후부터는 두 주인공 창만과 유나의 ‘러브 라인’이 주 소재다.
드라마의 주 무대는 두곳이다. 옥탑방이 있는 2층짜리 다세대 주택과 어르신들의 ‘불륜의 현장’이란 오명을 엎어쓴 콜라텍이 그곳이다. 서울 시내에 아파트들이 아무리 울퉁불퉁 솟아 올랐어도, 여전히 서울 시민 다수는 주택에 산다. 2000년대 초, 술 대신 콜라를 팔면서 청소년들 ‘향락’의 공간이었던 콜라텍은 점차 도시 내 후미진 곳으로 숨어들면서 어른들의 윤락장이 돼 버린 그 곳. 두 공간의 공통점은 이 사회 ‘서민’들의 공간이란 점이다. 각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아 숨쉬는 것은 이 드라마의 최대 강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등장인물들을 아주 악인으로도, 너무 선인으로도 그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디 흔한 사람들인 탓에 공감은 배가된다.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여성의 자살에 대해 홍 여사는 “사람이 가려면 곱게 가야된다. 월세를 두달치나 미뤄놓고 갔다”고 불평했고 남편(한만복)은 “사람들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줄 모른다”며 맞장구를 친다. 이 장면엔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요양원 입주를 막아서는 주민들의 한국 사회가 겹친다. 그럼에도 홍 여사를 미워만 할 수 없다. 홍 여사는 의붓딸(한다영)을 한없이 사랑하고 창만을 다영과 연결시키기 위해 귀여운 음모도 꾸민다. 홍만복 역시 돈 한푼 받지 않고 치매 걸린 ‘형님(장노인)’을 모셨고, 최근엔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했었다’면서 장 노인의 요양원 가는 길에 눈물을 글썽인다.
남의 ‘깝지’를 제 지갑으로 생각하는 천상 ‘소매치기’ 유나도, 극 중반에 이르러선 아들 병원비를 소매치기 당한 할머니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방식으로 선행을 하고 남의 마누라 눈에 눈물 흘리게 했던 ‘꽃뱀’ 미선의 입에서 “진실한 사랑은 사업이 될 수가 없다”면서 제 나름의 직업 윤리를 강조하기도 한다.
형사시절 뒷돈을 하도 받아 ‘봉걸레’라고 불렸던 전직 형사 봉달호는 자신이 운영하는 노래방에 도우미가 부족하자 마누라를 손님들이 있는 방에 들여 보내놓곤 벽에 기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이외에도 건달 시절 멋진 문신을 새기려 일본인 문신 기술자에게 “쌍도끼를 그려달라” 요청했으나, 기술자가 ‘쌍도끼’를 ‘산토끼’로 잘못 알아들은 탓에 등짝 가득 꽉차게 산토끼 문신을 평생 새기고 살아가는 ‘마사까리 형님’도, 남편의 폭력 때문에 연하 남성과 ‘밤기차’를 타고 도망쳐 나온 혜숙, 그리고 친누나 곁에 거머리처럼 붙어 먹고 사는 ‘계팔이 삼촌’도 얄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다.
오히려 드라마 말미에 등장한 유나의 친엄마와 세진실업 사장인 양아버지가 유나의 거리에선 ‘이방인’이다. 잘 교육받아 성품이 착한 유나의 배다른 동생과, 갑자기 등장한 부인의 전 자식에 대해 “당신 딸이면 내게도 딸”이라 말하는 인품 훌륭한 양아버지는 너무나 ‘전형적(stereotype)’이라 되레 비현실적이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돼버린 한국 사회지만 ‘유나의 거리’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부자가 되거나 성공을 몸으로 실천해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계급의 벽’은 그들을 테두리 밖으로 내보낼 여지를 주지 않는다. 드라마 말미에 뒤늦게 부자 엄마를 만나 ‘강데렐라’가 된 유나의 사례도, 실은 숨겨놨던 ‘떼부자 엄마’를 만나지 않고선 스스로에 제시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반증하는 역설이 된다.
대신 드라마의 인물들은 ‘성공’의 자리에 ‘공동체’를 놓는다. 둘러쳐진 담장이 너무 높아 벽 바깥으로 나갈 가능성이 없을 때, 당신의 머리를 밟고 올라봤자 여전히 같은 공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을 때에야, ‘이웃’이란 곁자리를 옆 사람에게 허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치매 걸린 문간방 어른이 실종됐을 때 다세대주택 식구 전원이 밤새 노인을 찾아 나서고, 치매 증상이 심해지는 밤마다 당번제로 문간방 어른의 방을 지키는 모습도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나 엄마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모인 소매치기 모임에선 바닥인생들의 ‘의리’가, 유나의 대형 소매치기 작전 방해를 위해 발벗고 나섰던 ‘봉걸레’와 ‘창만’도 ‘저들’이란 인식 대신 ‘우리’를 놓았기에 가능했던 작당이었다.
너무나 명백한 ‘선악 구도’에, 쉴새없이 얽히고 섥힌 ‘알고보니 남매’류, ‘나쁜놈과 나쁜년’들의 배신과 음모가 어지럽게 춤추는 내용으로 구성된 막장 드라마들 사이에서 ‘유나의 거리’는 보기 드물게 사람 냄새 나는 드라마였다. 오는 10일과 11일 단 2회(49회와 50회)만을 남겨두고 있는 ‘유나의 거리’가 끝나면 허탈해할 애청자들도 적지 않을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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