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교수 ‘정조대의 방역: 안전과 호혜의 모색’
의심자,확진자,치료자,사망자,치료중 주기 보고
역병 걸리고도 쉬쉬하는자, 축소보고 색출 엄단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업적도 많고 정치적 격변도 많았던 조선 영조,정조 재위기는 역병기, 홍역의 시대였다. 1727년 11월 25일 영조는 희정당에서 신하들과 정치현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일 교리 이광덕은 “동생의 병이 역병으로 의심된다”며 입시하지 않았다. 그만큼 역병은 민가는 물론 궁궐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조대에 이르러, 역병 환자로 의심되는 경우, 도성 밖으로 격리하도록 했다. 주무관청은 한성부(서울시)였다. 정조때의 격리,재난지원,환자관리,약물연구투약 등 과정에서 요즘 진행되는 K방역의 일단도 엿본다.
▶역병 의심환자 반상 무관 격리조치= 1788년(정조 12) 5~6월 사이에 수도권에 역병 의심환자가 발생하자, 중부에선 의심환자 96명을 교외에 출막(出幕)했고, 동부에선 132명을 교외 58곳에, 서부에선 163명을 97곳에, 남부에선 660명을 272곳에, 북부에선 320명을 격리조치했다.
아울러 ‘병인 1296명 중 현재 앓는 자(方痛) 729명, 회복중인 자(向差) 548명, 이미 사망한 자(病故) 19명이라고 보고했다. 요즘처럼 매일은 아니라도 닷새에 한번씩 주기적 실태공개가 있었다. 격리는 반상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도성 밖 병막(病幕)의 상황은 당시 비변사 낭청 유상엽(柳相燁)의 기록에 잘 나타나있다. 병막에 거처하는 이들에게는 비를 맞지 않도록 거적을 내려주고 바닥과 지붕을 만들고 나무 기둥을 세워 임시 텐트와 같은 모양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병민(病民)의 상태를 분석하니 앓는 사람(方痛)이 5분의 2인데 모두 경미한 상태이고, 그 중에 죽은 사람은 모두 노쇠하고 병약하여 평소에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격리된 역병 환자들을 세밀하게 관찰 및 분류하여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막의 숫자와 병민의 수를 고려 해보면, 대략 하나의 병막에 한두 사람 정도만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호(경인교대) 교수는 최근 온라인으로 국립민속박물관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정조대의 방역(防疫): 안전과 호혜의 모색’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전했다.
당시 격리의 원칙을 지키는 동시에 비변사와 진휼청의 공조로 격리 환자들을 세심하게 관리했다고 김교수는 발표했다.
▶확진자, 치료자, 사망자, 치료중인자 주기 보고= 이런 보고는 일정한 주기로, 관할청별로 계속됐다. 동활인서(東活人署)의 보고에는 의질에 걸린 사람은 17명인데, 그중에서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 11명, 회복 중인 사람이 3명, 이미 귀가한 사람이 3명이었다. 서활인서의 경우, 의질에 걸린 사람은 22명인데, 그중에서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 8명, 회복 중이 14명이었다. 전국 1745명 중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 433명, 회복 중인 사람이 1130명, 나아서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 153명, 사망자 29명이며, 병막은 도합 698곳이었다는 당시 기록도 소개했다.
당시 진휼청에서는 가족들과 분리되어 병막에서 생활하는 병민들에게 곡식을 지급했다. 격리된 병민들에게 음식을 지급하도록 한 것 역시 기왕에 없던 정조의 특별 정책이었다. 정조는 즉위 초 부터 ‘혜정(惠政)’을 매우 중시했는데, 역병 발생 상황에 대비하여 병민들을 적극적으로 구활하도록 했다.
특히 ‘병세 심한 사람을 취하는데 힘쓰다 보니 누락된 자가 없지 않았고, 여러 날 먹지 못한 자가 있기도 하여 8일 만에 구휼미를 나누어 주는 기한을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면서 긴급히 실무자를 불러 배급받지 못한 환자들에게 예비 쌀을 투입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8일에 한번 재난지원, 힘겨운 곳 수시지원= 이후 8일에 한번 배급하는 주기는 힘겨워하는 곳 즉시 투입으로 개선된다.
이처럼 정조대는 도성내 역병 환자를 성 밖으로 격리하여 도성의 안전을 꾀할 뿐만 아니라 병 민과 같은 약자들에게 곡식을 지급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정조는 이러한 정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같은 호혜 정책(혜정)을 총정리해 ‘혜정요람(惠政要覽)’을 편찬하기도 했다고 김교수는 전했다.
나중엔 역병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은데도 무조건 의심환자를 교외의 병막으로 내보내는 일이 생기자 이에 저항해 자신의 감염을 숨기는 경우들도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의심환자들을 더 격리시설에 수용하기 위해 회복한 환자를 정확히 파악해 귀가조치하는 시스템이 강화됐다.
정조는 지방 환자관리도 관리들을 꾸중해 가면서 챙겼다. 6월 28일 경상감사와 전라감사의 장계는 관내 지역의 미미한 수준의 역병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본 정조는 환자의 수가 너무 적은 것을 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질책하고 제대로 된 조사와 구휼을 지시했다고 한다.
▶축소 보고 문책, 치료약물 개발 투약=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보고한 인수(人數)를 병증(病症)으로 참작해 보면 그 수가 많지 않는데 이는 참으로 실제 수효대로 낱낱이 아뢴 것이 그러한 것 인가? 아니면 대충 적어서 그러한 것인가? 많고 적고를 물론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는 굶주리기 전에 각별히 구휼하고 사망자 중에 의탁할 곳 없는 자는 거두어 묻어주는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말라고 다시 엄히 신칙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정부가 백성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적절하게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백성들을 불길 속으로 던지는 것과 다름 없다”고 강조했다.
역병으로 사망한 자들은 국가에서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도록 한 규정에 따랐다.
정조의 역병 정책은 후일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더욱 발전시킨다. ‘역병이 유행할 경우 지방관은 수만 금을 써서라도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을 제조하여 값싸게 백성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지방의 의생(醫生)들로 하여금 약물을 마련하도록 하면 인명을 널리 구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다산은 청나라 소아전문의 맹개석(孟介石) 처방과 조선의 홍역 연구자인 유의(儒醫) 이헌길의 처방, ‘이피삼육탕(二皮三肉湯)’을 특별히 소개하며 약물 연구개발을 강조했다.
중앙정부에선 환자관리·치료약물 관리 및 투약과 관련해 1786년(정조10) 구료절목이라는 매뉴얼도 만들었다.
전의감과 혜민서는 홍역을 치료하는 의술에 정통한 사람을 각각 3원(員)씩 뽑아,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떠나지 않고 약물 조제와 진단에 몰두하도록 했다.
소용되는 환제(丸劑)나 탕액(湯液) 등의 약물은 먼저 양의사의 공물(貢物) 가운데서 마련하여 준비하고, 부족한 수량은 진휼청에서 소용되는 양에 따라 별도로 구획(區劃)한다고 명문화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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