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조가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역사 기록을 연·월·일순으로 정리하는 편찬 체재)로 쓴 사서(史書)다. 이 사서는 국보 제151호로, 1997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당시 이를 발표했던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외국(外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등재 이유를 설명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중국, 월남(베트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을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 왕조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켜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 탈락이 없었던 ‘조선왕조실록’이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의 실록에 견줘도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문화재관리국은 전했다.
‘조선왕조실록’이 후세에 이 같은 ‘극찬’을 받기까지는 당시 사관(史官)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를 만들었다. 사초를 위한 사관의 근성은 창업의 일등공신으로 일컬어지는 태종 이방원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1404년(태종 4년) 2월 8일 태종이 노루 사냥 중 고꾸라진 말에서 떨어졌다. 창피했던 태종은 신하들에게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관의 노력 덕에 ‘태종실록’에는 해당 일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의 왕 중 자신이나 부왕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거의 없었다. 연산군이 무오사화 때 아버지인 성종의 사초를, 그마저도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가 베껴 온 것을 읽은 것이 마지막이다. 당시 연산군은 문사들이 사사건건 간섭한다며 분풀이를 벼르던 차였다. 사화(史禍)로도 불리는 무오사화를 통해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왕위 찬탈을 꾸짖는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부관참시됐다. 사관 김일손 등도 거열형, 참수형 등 극형에 처해졌다. 이후 이 사건은 최악의 선례가 돼 왕조가 끝날 때까지 사초 열람은 금기시됐다. 자신이 연산군 같은 폭군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오사화 당시 모습은 최근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추진 과정과 어찌 보면 비슷하다. 이 법은 허위·조작 보도를 한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여권은 “일부 독소 조항을 고쳤다”며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 법을 통과시켰다. 처벌 기준이 되는 고의·중과실 범위, 대상이 되는 허위·조작 보도 개념은 여전히 모호해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3분의 2 가까운 의석을 차지한 여당은 ‘숫자의 힘’을 앞세워 국회 본회의 의결을 강행할 태세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역사를 가리려 하는 것일까. 전제 군주였던 조선의 왕들도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이다. ‘5배의 손해배상’이라는 부담 속에 현대의 사관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은 위축되고, 현대의 실록이라고 할 수 있는 보도는 사실의 왜곡으로 가려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연산군 이후 무오사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단죄됐고, 김일손 등 희생됐던 사람들은 신원됐다. 사필귀정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이 새삼 떠오른다.
신상윤 사회부 사회팀장
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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