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이세돌 맹공형
윤석열, 이창호 뚝심형
홍준표, 조훈현 제비형
2021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신진서 9단과 박정환 9단의 대결이 불을 뿜고 있다. 3전2승제로 열리는 대회에서 신 9단은 지난 1일의 결승1국에서 불계승했다. 최종 승자는 아니다. 이대로 2승으로 신 9단이 우승할지, 박 9단이 역전을 일굴지는 지켜볼 일이다. 우승컵 향방은 신(神)만이 안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호각세다.
바둑팬 모습은 평온하다. 이번 삼성화재배는 그 자체는 우리 잔치가 됐다. 삼성화재배 우승컵은 지난 6년간 중국의 차지였다. 신 9단과 박 9단이 내로라 하는 중국 강자를 다 물리치고 둘이 결승에 오름으로써 그걸 6년만에 뺏어왔다. 국내 1, 2인자인 둘이 결승서 자웅을 겨루고 있어 누가 우승해도 우리의 우승컵이 되는 것이니 바둑팬은 비교적 편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피말리는 심경이다. 프로는 생사를 걸고 전투에 임하는 법. 현역 최고 인공지능(AI) 수준의 바둑스킬을 구가한다며 ‘신공지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신 9단과 ‘무결점 바둑’으로 중국 평정에 남다른 성과를 올리고 있는 박 9단의 자존심 싸움은 ‘반상의 혈투’로 펼쳐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삼성화재배 대회를 대선정국과 오버랩하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일종의 ‘바둑의 정치학’이다. 국내 바둑인구는 통상 300만명. 이들 바둑애호가에게 이번 삼성화재배가 주는 행간이 대선과 맞물려 여운을 던지는 것이다.
바둑은 그 자체가 전쟁이요, 전투다. 반상은 전쟁터고, 정치적 전략과 전술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바쁜 군무 중에도 바둑을 즐겼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바둑을 통해 전략을 살피고 또 살폈던 것은 아닐까요”(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전쟁이 일종의 정치의 연장선상이라면, 바둑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생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바둑은 지략과 모략이 넘치는 정치와 닮은 꼴이다. 특히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요구되는 대선구도는 바둑세계와 흡사하다. 프로들 간의 피튀기는 반집 싸움은 대선의 51대49 게임과 유사하다. 포석과 자충수, 계가, 꼼수와 사석작전, 장고와 악수 등의 바둑용어를 각 캠프에서도 차용한다.
바둑은 기풍(바둑 두는 스타일)으로 승부한다. 세계 바둑계에 우주류 신드롬을 일으킨 다케미야 마사키, 끝내기 미학으로 바둑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창호, 당대 최고의 전투사 조훈현 프로 등은 각자의 기풍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대선 역시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이하 후보로 통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경선 후보(이하 후보로 통일), 같은당 홍준표 대선 경선 후보(이하 후보로 통일)의 경우도 포석과 중원 싸움, 계가에 몰입하며 ‘자신만의 기풍’을 설계하고 있을 것임엔 이견이 없다. 특히 이번주 운명을 건 경선의 승패가 갈리는 윤 후보와 홍 후보의 입장에선 최선의 끝내기수를 찾아야 하는 절박감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삼성화재배 ‘신박(신진서-박정환)대결’에서 엿보이는 대선의 정치학은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까.
신박대결은 기싸움, 대선도 기싸움
사실 박정환 9단의 천하는 흔들린지 오래다. 박 9단(29)은 지난 10년 가까이 한국 부동의 1위였다. 세계 최절정 고수가 즐비한 중국의 거센 공세에 홀홀단신 맞서며 ‘바둑강국=한국’의 입지를 강화해온 이다. 그런 박 9단은 어느날 밀레니엄 키즈인 신진서 9단(2000년생·22)에게 밀려났고, 현재는 한국랭킹 2위다. 박 9단의 실력이 모자란다고 말하는 바둑 전문가는 거의 없다. 오히려 신 9단을 견제할 선수는 박 9단 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인공지능급 바둑을 두며 중국강자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신 9단과 견줄 이는 국내에선 박 9단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박 9단이 신 9단에 계속 패하는 것은 나이 차이에 따른 체력과 중반이후 수읽기 열세 때문이지만, 그 주된 이유를 ‘기싸움’으로 해석하는 이가 많다. 김성룡 9단(바둑 해설가)이 대표적이다. “박 9단이 신 9단을 만나면 기싸움에서 일단 지는 것 같아요. 실력은 아직 최정상인데, 신진서 앞에선 유독 자신없어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커제(중국 프로기사)에겐 ‘고양이 쥐 몰듯’ 위력적인 바둑을 두는데, 왜 신 9단과 대결하면 실수도 잦은 지 모르겠어요.”
지난해 한국 바둑계의 최대 흥행카드였던 ‘아름다운 보물섬 남해 신진서 VS 박정환 바둑 슈퍼매치’는 이런 분위기를 대변했다. 대회는 7번기로 열렸다. 한판도 아니고 일곱판이나 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신 9단의 7연승. 일곱판을 내리 이긴다거나, 진다는 것은 실력이 비슷비슷한 아마추어계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하물며 반집을 다투는 세계 최고수 간 대결에선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중론이다. 바둑계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박 9단이 아무리 출중한 신 9단이라고 해도 일곱판을 연속해 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당시 바둑계의 평가였다. 이에 박 9단이 심리적으로 신 9단에게 제압당했고, 그런 기싸움 열세가 패배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바둑계에선 뒤따랐다.
기싸움은 대선구도에서도 중요한 포인트다. 대선주자 간 펼쳐지는 개인간 공세-수성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재명 후보는 윤석열 후보를 이길 후보라고 맹공을 퍼붓고 있고, 윤 후보나 홍준표 후보는 자신만이 대장동 의혹을 파헤칠 적임자라며 이 후보에 융단폭격 중이다. 서로 양자간 가상 대결을 설정, 기싸움 우위를 노리고 있는 셈이다.
대선주자들의 바둑 솜씨는 어떨까.
이재명 후보의 바둑실력은 수준급으로 알려졌다. “포석을 두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판세를 정확히 읽고, 때론 승부수를 과감히 던지는 스타일이죠.”(이 후보 캠프 관계자)
윤석열 후보 역시 바둑 인연은 일찌감치 맺어졌다. 그는 바둑 명문학교인 충암고 출신이다. 충암고는 이창호 9단, 유창혁 9단 등 수많은 바둑고수를 배출한 학교다. 고교 때부터 바둑기술과 바둑인생에 대해 체화됐고, 바둑을 통한 사고 전략화가 일상화됐다는 게 캠프 측의 말이다. 윤 후보는 충암고 고교 동문 모임을 40년이상 꾸준히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바둑사관학교의 인맥이 알음알음 정치 밀알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선주자 바둑실력, 그리고 스타일
홍준표 후보는 정가의 대표적인 바둑 애호가다. 국회 기우회 회원이기도 한 그는 아마 1단 실력이라고 한다. 그는 국회의원 친선 바둑대회에서 동료 의원과 수담을 펼치기도 하면서 바둑 사랑이 만만찮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홍 후보는 그 옛날 검찰 상부에 미운털이 박혀 한직으로 쫓겨났을때 사무실에서 출입기자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세월을 낚았던 것일까.
세 후보의 이제까지의 정치 스타일과 행보를 들여다보면 어떤 기풍의 바둑을 둘지 유추 가능하다.
이재명 후보 행보는 최강 공격능력을 갖춘 ‘이세돌 바둑’을 연상케한다. 천년만년 군림할 것 같던 이창호 9단을 꺾고 한시대를 풍미한 이세돌 프로는 인공지능 알파고를 꺾은 유일한 인간 프로로도 유명하다. 이 9단은 현역시절 먹이를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맹렬한 승부사 기질을 보여줬다.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반격수를 내놨다. 세계 초일류 공격수라도 이 9단의 역습에 혼비백산 표정을 지으며 무너진게 한두번이 아니다. 대장동 의혹 중심에 서 있는 이 후보는 최근 관련 장소인 성남 제1공단 근린공원 조성 현장을 찾아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 제도를 만들겠다”고 했다. 대장동 의혹과 무관함을 강조하며 그것에 대한 정면돌파를 선언한 것이다. ‘강에는 강으로’ 맞서는 이 후보 기질이 확연이 드러난 사례다. 이 후보 캠프 관계자는 “상대방이 공격하면 더 강력한 승부를 하는 이 후보 스타일이 유권자에 호응 받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할 말은 맘껏 하던’ 이 9단의 모습은 ‘사이다’ 이 후보 캐릭터와 흡사해 보인다.
윤석열 후보 하면 ‘뚝심’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정가에선 대체로 문재인정부에 맞서 뚝심으로 버틴 윤 후보의 장점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결국은 오늘날 야권 대표주자로 올라선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돌부처’ 별칭을 갖고 있는 이창호 9단의 우직한 기풍이 윤 후보의 스타일과 오버랩된다. 윤 후보가 최근까지 ‘1일 1실언’이라는 눈총을 받으며 이 9단의 신중한 기질과는 다소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좀더 세련된 발언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창호형 뚝심이 계속 유효할지 주목된다.
홍준표 후보의 성향을 보면 한때 바둑황제로 불렸던 조훈현 9단의 ‘제비 행보’를 연상케한다. 현역시절 조 9단의 별명은 ‘조제비’였다. 무엇보다 날렵해서 그런 소릴 들었다. 뛰어난 임기응변과 상황 판단력, 세가 불리하면 상대방 큰집에 과감히 뛰어들어 폭파하는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 그런 날쌘돌이는 조 9단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상대방을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강약조절식 몰아부치는 홍 후보의 스타일은 이런 ‘제비 바둑’을 떠올린다.
음미할 대목은 바둑세상도 정치세상도 ‘영원한 1등’은 없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천하를 평정했던 김인 국수는 ‘제비’ 조훈현 국수에게 무너졌고, 조 국수는 제자인 ‘돌부처’ 이창호에게 바둑 황제 자리를 넘겨줬다. 천재형 승부사 이세돌 9단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이창호 벽을 뚫었지만, 그 바통 역시 박정환 9단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박 9단마저 ‘신공지능’ 신지서 9단에게 밀려 현재의 바둑계는 ‘신지서 세상’으로 전개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신지서 역시 영원한 강자로 남을 수만은 없는 게 바둑이치요, 세상이치다. 언젠가 철옹성(신 9단)을 깨고 천하를 제패하는 신흥강자는 나올 것이다.
대선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대통령에 당선되겠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곤 뒷사람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숙명에서 벗어날 순 없다. 바둑의 정치학은 그래서 대선주자 대결이 한창인 지금에도 유효한 교훈으로 맴돌고 있는 것이다. 강문규·이원율 기자
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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