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제 모습 찾기’ 일환으로 수도방위사령부를 이전하고 빈자리에 남산골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1년이다. 1730년 영조 6년 금위영 분영 남별영을 설치한 곳이었다. 일제는 조선헌병대사령부를 지었고, 군부독재정권은 쿠데타에 참여한 부대를 모아 수도방위사령부를 만들어 이곳으로 옮겼다. 남산골공원에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과 남산골전통정원 그리고 남산골한옥마을 등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와 독재의 망령을 걷어내고 ‘남산 제 모습을 되찾기’를 위한 사업이다.
남산골한옥마을에는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과 대한제국 시종원경 윤덕영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등의 한옥을 옮겨 짓거나 새로 지었다.
윤택영은 윤덕영의 동생이다. 1907년 딸이 황후가 되면서 해풍부원군에 봉해졌다. 1910년 일왕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은사공채 50만4000원을 받는다. 1912년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 일왕 즉위 대례기념장, 1917년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는다. 엄청난 부채를 지고 빚독촉에 시달린다. 1920년 베이징으로 도망친다. 1935년 10월 객사했다.
윤택영 재실은 순종이 처가 제사에 참석하는 데에 불편하지 않도록 지은 건물이다. 경운궁을 허물 때 나온 목재를 가져와서 지었다. 제기동에 있었던 건물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겼다. 맨 뒤 재실 사당은 4·19혁명 때 국민이 불태웠다. 이후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수도 한양 500년을 노래한 가사문학작품 ‘한양가’에는 윤택영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합방 이후 한양 보소 만고역적 윤택영이 / 부원군 명색되고 인군(임금)에 옥새빼사 / 일본통감 갓다주고 저에비절 벗고나내.”
윤택영이 황제에게서 옥새를 빼앗아 일본 통감에게 갖다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빚을 갚았단다. 당시 민심은 윤택영을 매국 원흉으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옥새를 훔쳐서 한일합방 조약서에 날인하게 한 것은 윤덕영이다.
1910년 8월 시종원경(侍從院卿)이었던 윤덕영은 합병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해서 가결시켰다. 시종원경은 요즘 대통령비서실장에 해당한다. 나라를 판 대가로 자작 작위를 받고 일왕에게 은사공채 5만원을 받는다. 전체 옥인동 부지의 54%를 사들여서 아방궁을 짓는다. 같이 나라를 팔아먹은 동지 이완용이 이재명 의사 칼에 맞는다. 윤덕영은 서촌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첩에게 옥인동 집을 준다. 지금도 서촌에 그대로 있다. 너무 낡아서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기지 못했다.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지었다.
관훈동 민씨는 민영휘를 말한다. 본명은 민영준이다. 1905년 12월에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 선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1907년에는 헤이그밀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종에게 양위하라고 주청하고, 일본국 세자가 조선에 올 때 환영위원장을 맡아서 환영행사를 주관한다. 1910년에는 정우회 총재로서 한일합방 찬성운동을 벌이고, 일왕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 5만원을 받는다. 1919년 한일 강제병합 주범인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소향식 발기인으로 사망을 애도한다. 일제는 민영휘가 참 고맙다. 1928년 7월 일본국 정부는 금잔을 주고,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는 은잔을 준다. 12월 30일 다시 금잔을 준다. 죽었다고 또 준 잔이다. 이러한 자들의 집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이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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