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분 캐스팅’ 논란에 노출된 ‘허약한 토대’

구조적인 문제·시스템 부재·지나친 팬덤

‘티켓 파워’ 높은 의존도...스타권력 키워

출연료 격차 부작용에 신인발굴 부재도

언젠가 한번은 터질 일...‘긍정적 도화선’

긴 안목으로 보면 좋은 예방주사 맞은것

뮤지컬 ‘몬테 크리스토’에 출연한 신성록 이지혜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뮤지컬 ‘몬테 크리스토’에 출연한 신성록 이지혜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스타 캐스팅’, ‘티켓 파워’를 향한 높은 의존, 주조연·앙상블 배우들의 출연료 격차, 새로운 스타 탄생의 부재, 지나친 팬덤 문화....

화려한 성공 뒤에 그림자가 짙었다. 연간 4000억원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한 뮤지컬 업계는 지금 혹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친분 캐스팅’ 논란에서 시작된 파장으로 업계는 기초 공사 없이 달리기만 한 ‘허약한 토대’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마타하리’여주인공을 맡은 솔라와 옥주현 [연합]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마타하리’여주인공을 맡은 솔라와 옥주현 [연합]

사건의 발단은 뮤지컬계 여성 배우 중 가장 강력한 티켓 파워를 지닌 옥주현을 둘러싼 ‘친분 캐스팅 의혹’에서 시작됐다. EMK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하는 ‘엘리자벳’의 10주년 기념 공연에 여주인공으로 옥주현, 이지혜가 발탁되고, 그간 ‘쏘엘리(소현+엘리자벳)’으로 불리던 배우 김소현이 빠지자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선 이런 의혹을 제기했다. 이른바 ‘옥주현 사단’인 이지혜의 캐스팅에 옥주현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해 배우 김호영이 “아사리판은 옛말이다. 지금은 옥장판”이라고 남긴 한 줄의 글이 사태를 키웠고, 소송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이렇지만, 문제는 이후 더 커졌다. 남경주, 박칼린, 최정원 등 1세대 뮤지컬 배우들이 “배우가 캐스팅을 침범하면 안된다”는 호소문을 냈고, 동료 배우들이 호소문을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며 논란에 가세했다. ‘외딴 섬’이 된 옥주현의 고소 취하, 김호영과의 화해로 사건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은 옥주현을 둘러싼 갑질, 인성 등의 폭로글들로 떠들썩하다.

논란은 특정 배우에서 야기됐으나, 전문가들은 지금의 이 사태는 업계의 구조적 문제, 시스템과 매뉴얼의 부재, 팬덤의 지나친 개입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원종원 순천향대학교 교수는 “한국 뮤지컬 시장은 가파르게 팽창하다 한계에 이르러 정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지금 노출된 문제와 한계에서 벗어나 다시 성장하기 위해선 근간을 흔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뮤지컬 ‘드라큘라’의 김준수[오디컴퍼니 제공]
뮤지컬 ‘드라큘라’의 김준수[오디컴퍼니 제공]

스타 캐스팅과 팬덤이 키운 시장...20년 만에 30배 성장

빠른 성장 뒤엔 시한폭탄이 언제고 도사리고 있었다. 2001년 12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LG아트센터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한국 뮤지컬 시장은 급격한 성장을 거쳤다. 2000년까지만 해도 140억원대의 규모에 불과했던 시장은 현재 20년 만에 4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원종원 교수는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이 빨리 성장한 배경은 스타 마케팅의 적절한 운영과 팬덤 문화였다”고 말했다.

2010년 국내외 최정상에 오른 아이돌 스타들이 대거 유입됐다. 동방신기, JYJ 출신의 가수 김준수가 대표 사례다. 2010년 김준수는 뮤지컬 데뷔작 ‘모차르트’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전 회차, 전석을 모두 팔아치웠다. 이후 이름값 높은 배우, 가수 등이 줄줄이 뮤지컬 시장으로 유입돼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다. 옥주현의 경우 2005년 뮤지컬계에 입성했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는 없는 이른바 ‘멀티플 캐스팅’이 한국 뮤지컬 시장에 도입된 것도 관객 팬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였다. 한 작품에 2~3명은 기본 이젠 4명(쿼드러플), 5명(퀸터플)의 주연배우가 캐스팅된다. 오는 8월 개막을 앞둔 ‘서편제’ 여주인공 ‘송화’ 역에는 차지연 이자람 등 무려 6명이 캐스팅됐다. 한국 뮤지컬 고유의 문화인 ‘회전문 관객’이 생겨난 것도 다양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제작 시스템 때문이다.

뮤지컬계가 ‘스타 캐스팅’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대극장에 오르는 대형 작품이 물밀듯 쏟아지면서다. ‘오페라의 유령’을 기점으로 제작비가 수십억, 수백억원 대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 등장했다. 이는 한 회차당 채워야 하는 관객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원 교수는 “객석수가 많다는 것은 동원 관객수,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스타 활용의 필요성을 함께 가져오게 된 구조적 문제”라며 “스타 캐스팅의 폐해를 알아도 공연장의 규모가 작아지지 않는 이상 제작자들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스타 향한 높은 의존도...권력 키우고 출연료 격차 커지고

‘티켓 파워’를 가진 스타들이 유입되며 한국 뮤지컬 시장은 기이할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였으나, 그로 인한 부작용과 우려가 적잖다. 스타들을 향한 높은 의존도는 주조연 배우 사이의 출연료 격차, 대우 문제를 불러왔다. 업계 안에서 발굴해야 할 새로운 스타 탄생의 길도 막았다. 성장 뒤에 가려진 뇌관이 터진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높은 스타 의존도는 주연 배우들의 권력을 키웠다.

지혜원 교수는 “스타 캐스팅은 해외에서도 볼 수 있는 사례다”라며 “다만 브로드웨이에는 배우 조합이 있어 어떤 스타가 와도 똑같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는데, 우리 뮤지컬계는 원칙과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아 여러 문제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출연료 격차는 큰 문제다. 뮤지컬계에서 출발해 성장을 꿈꾸는 다른 배우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긴다. 업계에 따르면 출연료는 인지도, 배역, 성별에 따라 다르다. 대형 뮤지컬의 경우 남자 톱배우가 회당 2000~3000만원까지 출연료를 받아갈 때, 앙상블 배우들은 평균 10~30만원대의 출연료를 받는다. 업계에선 해외에서처럼 ‘출연료 상한제’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원 교수는 “브로드웨이에선 히트 작곡가들이 개런티를 많이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 상한선을 정해 로열티 캡을 씌운다”며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돈을 가져가면 시장이 공멸하니 업계가 나서 막겠다는 의미다. 우리도 인기 배우라고 너무 많은 출연료를 가져가지 않도록 상한선을 둔다면 격차가 해소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영향력을 제도 안에서 제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뮤지컬 시장은 그 어떤 시스템도 부재하다. 그 결과 이번 사태의 발단인 옥주현은 현재 ‘스타 권력’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일련의 논란은 대중문화 업계 어디에서나 발견된 현상이다. ‘친분 캐스팅’, 현장에서의 다양한 요구 등은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혜원 교수는 “영화, 방송에서 창작자, 스태프, 배우들이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캐스팅에 추천을 하는 사례가 있고, 그렇게 발굴된 배우들이 성장해 미담이 된 경우도 많다”며 “어떤 것을 인맥, 친분 캐스팅으로 볼 것인지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현장에서의 배우들이 컨디션 조절을 위한 다양한 요구도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라고 봤다.

다만 진실 여부를 떠나 스타 권력의 갑질 사례가 쏟아지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원종원 교수는 “인기 배우는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고, 아티스트로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길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뮤지컬 ‘웃는 남자’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뮤지컬 ‘웃는 남자’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시장의 성장만큼 성숙한 인식도 요구...“좋은 예방주사 될 것”

사실 이번 논란의 시작은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한국 뮤지컬 업계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장르보다 팬덤이 두텁고, 관객들의 작품 분석과 비평도 많다. 매회차 한 작품이 끝나면 디시인사이드의 일명 ‘연뮤갤(연극 뮤지컬 게시판)’ 무수히 많은 평가가 오르내린다.

지혜원 교수는 “뮤지컬은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깝게 느끼는 매체라는 점에서 친밀감이 높아 다른 장르보다 팬덤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애초 뮤지컬 팬덤은 스타 배우가 아닌 작품을 향한 애정에서 시작됐다. 원종원 교수는 “팬덤 문화가 처음 나타난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작품에 집중했던 팬덤 문화가 점차 이동하게 됐다”고 봤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뮤지컬 배우 이지혜다. 이지혜 역시 ‘레베카’, ‘지킬 앤 하이드’, ‘팬텀’, ‘베르테르’, ‘몬테 크리스토’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왔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파친코’에 성악가로 출연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이지혜라는 배우가 옥주현이 꽂아줘야 하는 실력의 배우도 아니고, 작품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난데없이 폭격을 맞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지혜는 제작사의 오디션을 거쳐 합격했다. 특히나 “업계 안팎으로 스타 캐스팅의 부작용을 언급하면서도, 신인을 반기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지혜원 교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뮤지컬 팬덤의 지나친 개입에 비판적 시각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원종원 교수는 “시장이 성장하면 그에 맞게 의식이나 인식도 성숙할 수 있어야 한다”며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지지하고 그렇지 않은 배우를 미워할 수 있지만, 지나친 행동이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아직 개막도 하지 않은 작품인 만큼 제작사와 창작진의 전문성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부분이다. EMK뮤지컬컴퍼니는 스타 배우와 더불어 신인 발굴에도 힘을 쏟은 제작사다. 지혜원 교수는 “‘웃는 남자’를 통해 대극장 주연을 맡은 박강현이나 다수의 작품에서 활약하는 신영숙과 같은 배우는 지난 몇 년 사이 스타로 성장한 사례다. 프로듀서의 안목을 관객들이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일련의 사태’는 뮤지컬계에 상당한 충격 요법이 됐다. 업계에선 언젠가 한 번은 터질 일이었다는 목소리도 많다. 이번 사건들이 긍정적 도화선이 되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원 교수는 “이번 사건이 모티브가 돼서 시장이 성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면, 긴 안목에선 좋은 예방주사 맞은 것 같다는 낙관적 판단이 든다”고 말했다. 지혜원 교수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업계 전체가 공감하고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다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봤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