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한덕수 국무총리, 추경호 경제부총리,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도쿠라 마사카즈 일본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 회장이 최근 국내 일정 중 만난 인물들이다. 단 2박3일로 알려진 방한기간 마사카즈 회장이 대면한 국내 인사들의 중량감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대면 상대와 사실상 동급이다. 일본 게이단렌 회장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급진전됐다는 시그널을 주기에 충분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일본은 한국 핵심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소재 공급을 제한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은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였다. ‘일본과는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다’는 국민적 정서가 뿌리 깊게 박힌 가운데 양국 신경전에 한일 관계는 얼어붙을 정도로 경색됐다. 이런 상황에 반전에 가까운 만남이 성사되면서 벌써부터 한일 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마사카즈 회장이 ‘한일 재계회의’ 참석을 위해 전경련을 방문했던 7월 4일은 일본 정부가 2019년 반도체산업 핵심 소재 불화수소·불화폴리이미드·EUV레지스트 등 3개 품목 수출 규제를 통보한 날이기도 하다.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한일재계회의가 3년 만에 재개되기도 했지만 이날은 양국 무역 갈등의 뿔씨가 본격화된 지 정확히 3년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일재계회의 주요 의제도 수출 규제 폐지였다.
현 시점에서 수출 규제 폐지 자체는 실질적 효과보다 상징적 의미가 더 클 수 있다. 공급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이 대일 의존도를 크게 낮췄기 때문이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의하면 일본 불화수소 수입액이 2019년 3630만달러에서 지난해 1250만달러로, 66% 감소했다. EUV레지스트는 벨기에산 수입 다변화 등으로 대일 의존도가 50% 이하로 떨어졌고 불화폴리이미드 역시 대체 소재 채택으로 대일 수입 수요가 사실상 없는 상황으로 분석됐다. 초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국내 업체의 국산화를 통해 기술 자립에 성공했고 다른 품목들도 수입처를 다변화하며 일본 의존도를 낮췄다는 것이다. 이에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우책(愚策)의 극치’라며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문제투성이의 악수’로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이 돌파구를 마련하고 일본이 자성하면서 양국은 새 국면을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를 통해 양국 관계 개선에 뜻을 모았고, 한일 경제계도 앞장서 마중물을 놓았다. 중요한 것은 어렵게 되살린 ‘훈풍의 눈’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 강제 동원 배상 판결 등 정치·외교적 사안을 무리하게 경제·산업 협력 파기로 되갚는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한일재계회의에서도 ‘정치를 경제와 연계하지 않고 지속 협력하자’는 것이 주요 메시지로 공유됐다. 한국 정권이 바뀌어도, 일본 참의원선거로 보수가 더욱 결집해도 양국 경제 협력은 ‘명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훈풍이 미풍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같은 기조가 지속돼야 할 것이다.
killpas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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