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자문회의 도입 논의
재판본격 시작전 양측 증거 공개
쟁점 명확히...미국·영국서 활용
“항소율 감소 법원 부담 줄어들 것”
민소법 개정 필요...국회가 변수
일각선 “기업 비밀유출” 우려도
사법행정 사무와 관련해 대법원장을 자문하는 기구인 사법행정자문회의가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인 ‘디스커버리’ 도입 관련 사항을 논의했다. 1년이 채 남지 않은 김명수 대법원장 임기 중 구체적인 제도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법행정자문회의는 12일 10시 제23차 회의를 열고 디스커버리 도입, 사실심 충실화를 위한 검증 및 감정제도 개선 방안을 비롯한 주요 안건을 논의했다. 앞서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11월 법관을 주축으로 변호사, 교수가 참여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연구반을 구성해 연구·논의했고, 올해 8월엔 전국 법관들을 대상으로 디스커버리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로 흔히 설명되는 디스커버리는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양측 당사자가 증거를 서로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는 절차다. 미국, 영국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법조계에선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국내 소송 환경이 크게 바뀔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민사사건 가운데 대기업이나 국가기관, 의료기관 등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현행 제도보다 유의미한 증거 제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쉽게 공개하지 않던 자료가 법원에 제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결함 문제와 관련한 제조물 책임 소송전이 벌어졌을 때, 소송 쟁점과 관련성이 있으면 디스커버리 제도에 따라 재판에 들어가기 전 해당 기업이 설계 내역 등을 제출하게 된다. 설계에 관여한 담당자 등을 불러 물을 수도 있다.
그동안 법조계에선 오래 전부터 민사사건의 충실한 심리가 강조되면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재판이 결국 ‘증거 싸움’인데 각자 알아서 증거를 찾아 입증해야 하는 현행 시스템에선 소송 절차상 한계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사사건 전문가인 한 변호사는 “민사소송법상 문서제출명령이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요건이 까다롭다”고 말했다. 이어 “증인 신청도 법원에서 채택되기 쉽지 않다”며 “그러다보니 변호사나 재판 당사자들로선 재판에서 증거조사가 흡족하지 않다는 불만이 생기게 되고, 1심 판결 항소율이 40%를 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발간된 ‘2022 사법연감’에 따르면, 동일인의 과다소송 건을 제외하고 지난해 1심 민사 합의부의 전체 판결 건수는 총 2만5544건이었다. 이 가운데 1만1259건이 항소돼 44.1%의 항소율을 보였다. 민사 합의부 1심 판결 10건 중 4건 이상이 불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2020년 같은 기준 항소율 43.5%보다 0.6%포인트 늘어났다.
이 같은 부분은 법원 내에서도 공감하는 목소리가 많다. 김형두 법원행정처 차장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이던 2019년 서울대 ‘법학평론’에 ‘새로운 법조인 양성 체제하에서 미국식 디스커버리의 도입 방안’ 논문을 게재했다. 김 차장은 논문에서 “점점 더 많은 사건들이 항소되고 있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1심에서 증거조사가 충분하고 철저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디스커버리 도입을 주장했다. 또 “디스커버리를 도입하면 부실한 증거조사가 1심 판결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항소심에서 추가 증거조사를 하는 일이 누적돼 사건이 장기화되면서 법원의 부담이 늘었던 전반적 악순환 고리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대법원이 디스커버리 도입을 위한 구체적 안을 내놓더라도 국회가 움직여야 제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변수다. 이 제도를 도입하려면 민사소송법 등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1명의 의원이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도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같은 해 9월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된 후 별다른 입법 진척이 없는 상태다.
일각에선 디스커버리 제도를 시행하면 기업비밀이 유출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영국 등에서 이미 이 제도가 널리 활용되고 있어 한국의 상당수 기업들이 이미 준비가 돼 있는데다가 민사소송법, 특허법 등으로 영업비밀 보호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안대용 기자
dand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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