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레이먼드 카버 지음, 정영묵 옮김,문학동네)=개인의 불안과 상처를 건조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복잡한 여운을 남기는 단편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카버의 11편의 단편을 담은 소설집. 카버 재단의 승인을 얻어 오직 한국에서만 출간하는 이 소설집은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거나 절판돼 찾아보기 어려운 단편 11편을 엮었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망라한 소설집은 구체적으로는 1983년에 출간된 ‘정열’에 수록된 4편, ‘거짓말’,‘오두막’,‘해리의 죽음’‘꿩’과 카버가 사망한 해인 1988년에 출간된 ‘내가 전화를 거는 동안’에 수록된 ‘누가 내 침대를 쓰고 있든’ 등 7편을 실었다. 이 중 ‘정열’에 소개된 4편은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소설들은 카버 소설의 핵심 키워드인 두려움, 막연한 공포가 중심을 이룬다. ‘오두막’에는 아내 없이 홀로 산장 오두막에 묵게 된 주인공 미스터 해럴드의 불안감을 총상을 입은 사슴과 그를 위협하는 소년들로 구체화한다.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에선 한밤에 걸려온 전화가 불안과 두려움을 촉발한다. 전 아내나 아이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기 위해 전화선을 뽑고 잠들곤 하던 부부는 어느날 밤 전화선 뽑는 걸 깜박했다가 새벽 세 시에 누군지 알 수 없는 버드를 찾는 전화를 받게 된다. 잠이 달아난 부부는 병과 죽음, 생명유지장치의 플러그를 뽑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알코올 중독과 파산, 이혼 등 개인사가 반영된 소설과 이전 작품과 다소 결이 다른 체호프의 죽음에 대한 오마주랄 마지막 작품 ‘심부름’까지 독특한 카버 문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나다 도요시 지음,황미숙 옮김, 현대지성)=‘1시간짜리 드라마를 10분 요약 영상으로 해치운다’‘인터넷에 올라온 해석을 찾아보며 콘텐츠를 본다’‘처음 볼 땐 빨리 감기로, 재밌으면 보통 속도로 다시 본다’. 요즘 MZ세대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저자는 콘텐츠의 공급 과잉, 시간 가성비 지상주의, 친절해지는 대사 등을 이유로 꼽는다. 이 배경엔 성공 열망, 동료 집단에서의 안정감 등이 자리한다. 사실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 방식으로 영상을 소비하는 건 시청각이라는 영상 매체 언어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저자는 영상 작품의 묘미, 즐거움 대신 이들이 얻고자 하는 건 봤다는 일종의 도장찍기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어째서 그렇게 하면서까지 내용을 빠르게 알고 싶은 걸까? 소셜미디어를 통해 24시간 연결돼 있으며, 늘 어떤 반응을 요구받는 젊은 층에게 ‘그거 봤어?’‘재밌더라, 꼭 봐’같은 톡은 놓쳐선 안되는 숙제가 된다. 대화가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음악 등의 콘텐츠를 화제로 삼을 때 이런 화제를 무시하면 대화에 끼지 못할 뿐 아니라 ‘읽씹’ 혹은 화제에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소외당할 수도 있다. 유튜브에 편집, 소개되는 10여분 짜리 ‘패스트무비’나 빨리 감아 보기는 화제를 따라잡는데 도움을 준다. 저자는 80년대 개성문화와 오타쿠, 공감을 강요당하는 사회까지 젊은이들의 콘텐츠 소비의 변화와 이면을 흥미롭게 살핀다.

▶격정의 문장들(김경미 지음, 푸른역사)=남존여비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종종 무시됐지만 당당하게 제 주장을 펴는 여성들도 있었다. 상언과 상소를 통해 시국에 대한 이해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근대 계몽기에는 나라를 위하는 데 남녀가 없다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시국에 대한 의견을 신문사 투고 형식으로 개진했다. 그 중 신소당은 자신의 주장을 활달하게 편 여성논객 중 하나다. 광동학교 설립, 진명부인회 설립, 양정여학교 관련 활동을 하는 등 교육운동에 앞장선 그는 여학교를 세워 남자와 동등하게 황실을 보호하고 민생을 구제해야 한다고 제국신문에 글을 기고했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 후기와 근대 계몽기로 나눠 여성의 글을 살핀 책은 여성들의 글과 함께 시대적 배경 등을 자세히 살폈다. 개 중엔 오늘의 관점에서 봐도 놀라운 글들이 적잖다. 신임옥사로 멸문지화를 당한 노론 이이명의 부인 김씨 부인이 국명을 어긴 이유를 해명한 상언은 영조를 감동시켰다. 19세기 후반 우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손자 심희순의 첩이라는 기생 출신 초월은 시국의 적폐를 고발하고 개선책을 제시했는데, 통괘한 문장이 눈길을 끈다. 1898년 북촌의 여중군자 몇 명이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낸 ‘여학교설시통문’에는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노골적인 표현도 등장한다. 정조 대에 여성들이 제기한 억울함을 호소한 상언·격쟁은 405건에 이른다. 전체의 10퍼센트 정도로 평민층 부녀자가 사족 부녀자보다 3배 많다.

이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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