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지난 13일(현지시간) 유럽 최대 복합문화예술기관인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 피아니스트 조성진(28)은 이곳에서 올해 첫 솔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가 선보인 곡은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이자 첫 바로크 음반인 ‘헨델 프로젝트’의 ‘5번 E 장조 HWV 430’과 브람스의 ‘헨델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아름다운 두 손으로 써내려가는 한 편의 시(詩)에 바비칸 센터를 가득 메운 2000여명의 관객은 숨을 죽였다.
쇼팽 콩쿠르 이후 조성진은 드뷔시, 모차르트, 슈베르트·베르크·리스트를 지나 헨델에 이르렀다. 2년 여 만에 돌아온 조성진의 정규 음반 ‘헨델 프로젝트’는 ‘클래식 계의 BTS’로 불리는 그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낭만과 고전의 시대를 탐험했던 조성진이 첫 바로크 음반으로 헨델을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헨델은 클래식 애호가도 즐겨 선택하는 음악이 아닌데, 바로크 음반을 녹음하며 헨델을 고른 것 자체가 조성진이기에 가능한 레퍼토리”라고 봤다. 장일범 음악평론가 역시 “바로크에서 더 잘 알려진 바흐가 아닌 헨델을 골랐다는 아이디어가 빛났다”고 말했다.
조성진이 선택한 ‘헨델’은 그가 클래식 음악계에 차지하는 무게 만큼이나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해 성남아트센터에서 헨델 연주로 불씨를 지피고, 음반 발매까지 이어지자 난데없이 ‘헨델 열풍’이 불 조짐이다.
그의 스타성은 이미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증명됐다. 당시 발매한 음반은 국내에서만 초동(발매 후 1주일 간 판매량) 5만 장을 기록했다. 음반사는 부리나케 동일한 수량으로 음반의 추가 제작에 돌입했다. 2년 전 조성진이 베르크 소나타 음반을 냈을 당시에는 때아닌 베르크 붐이 일었다.
허 평론가는 “조성진이 연주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쉽게 감흥을 느끼기 어려운 헨델을 찾아 듣고 공부하게 된다”며 “클래식 음악계에선 흔치 않는 현상들이 조성진을 통해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지금도 조성진은 콘서트마다 ‘1초 컷’에 해당하는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의 주인공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조성진은 대중이 자신의 곁에 클래식 음악을 두는 대표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따뜻한 곡 해석·전략적 곡 배치…“역시 조성진” 찬사
이번 헨델 음반에 대한 평가 역시 상당히 좋다. 전문가들은 “조성진의 강점이 잘 살아난 음반”이자, “이전 음반을 능가하는 명반의 탄생”이라고 말한다.
음반에는 1720년 런던에서 처음 출판된 헨델의 하프시코드(피아노 전신) 모음곡 2권 중에서 조성진이 가장 아끼는 세 곡이 수록됐다. 조성진의 헨델은 온화하고 포근하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헨델 프로젝트엔 굉장히 맑고 촉촉하면서도 인간적인 특징이 있다”며 “하프시코드를 염두했다고 하나, 원전 연주에선 들을 수 없는 인간적이고 따스한 해석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조성진은 녹음을 앞두고 성악가 임선혜와 호흡을 맞춰온 스위스 하프시코드 연주자 세바스티안 비난트를 소개받아 레슨과 조언을 구하는 시간을 따로 가졌다. 현대 피아노를 하프시코드의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서스테인 페달(피아노 음을 지속시키는 페달)의 사용을 절제하며 강약을 제시했다.
허 평론가는 이 음반에 대해 “조성진의 강점인 성부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잘 살아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대 피아노의 울림이 주는 장점을 살려 헨델을 따뜻하게 표현했다”며 “헨델의 곡에는 여러 개의 성부가 나오는데, 조성진은 각각의 성부마다 서로 다른 색으로 채색했다. 각자의 색을 입은 성부들이 끼어 들어와도 기존의 성부들은 톤을 잃지 않으면서 어우러진다”고 분석했다. 류 평론가는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를 알지 못할 지라도, 바로크 연주에 있어 주목해야 할 만한 해석이 나왔다”고 강조했다.
음반에선 ‘곡의 배치’도 인상적이다. 하프시코드 모음곡에 이어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를 배치했다. 조성진이 ‘가장 완벽한 변주곡’이라고 생각하는 곡이다. 그는 “하프시코드 모음곡과 더불어 헨델의 영향을 창의적으로 탄생시킨 브람스의 곡을 넣고 싶었다”며 “브람스의 푸가는 천재적이다. 연주 테크닉에서나 음악의 복잡함이 연주자에게 도전이 되는 작품이다. 큰 산을 오르는 것 같아 힘들지만 정상에 도착하면 안도감이 들면서 감정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클래식 입문자들에도 쉽고 흥미로운 감상을 제시하는 구성이다. 허 평론가는 “헨델의 원곡을 통해 화성의 흐름을 먼저 들은 뒤, 브람스의 천재적인 변주곡으로 이어가며 헨델을 깊이 이해하도록 했다”고 봤다. ‘전략가 조성진’의 면모가 드러난 지점이다.
음반은 마지막 곡까지 흐름이 완벽하다. 브람스 뒤로 ‘B 플랫 장조 사라방드 HWV 440/3’와 빌헬름 켐프 편곡 버전의 ‘미뉴에트 G 단조’가 나오며 마침표를 찍는다. 류 평론가는 “이토록 심금을 울리는 정서를 어디에서 끄집어냈는지 굉장히 인상적인 마무리다”라며 “조성진은 맑은 서정성을 앞세워 인간적인 연주에 초점을 두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이번 헨델 프로젝트에선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은 여유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기복 없는 완벽주의자’…조성진, 또 한 번의 진화
여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한 조성진은 2011년 열일곱 살에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3위,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에 오르며 한국 클래식 계의 빅스타가 됐다. 쇼팽 콩쿠르 이후 동세대 연주자들 중 가장 눈부신 커리어를 쌓으며,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 나서는 긴 여정을 기꺼이 걸어가고 있다. 그 과정이 꽤 즐거워 보인다.
조성진은 새로운 음반을 내거나 공연을 할 때마다,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답보하는 음악가가 아닌, 전진하는 음악가다. 바로크 시대로의 본격적인 항해 역시 조성진의 또 한 번의 진화를 보여준다. 이 음반에선 고전과 낭만주의에서 익숙하게 보던 조성진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바흐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하지만, “바흐 역시 자신의 색깔로 만들 수 있을 것”(허명현 평론가)이라는 기대가 높다.
헨델 프로젝트와 함께 세계 투어도 이어지고 있다. 조성진의 음악가로의 행보엔 공백이 없다. 하노버·뒤셀도르프·함부르크·도르트문트·런던·밀라노 등 유럽 각지에서 리사이틀을 갖고, 한국에선 다음 달 정명훈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협연 무대로 관객과 만난다. 7월엔 리사이틀도 예정돼 있다.
허 평론가는 “조성진은 어느 시점부터 기복이 없어 믿고 들을 수 있는 연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어떤 것이든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는 꺼내 놓지 않고 완벽한 연주를 들려주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계획과 설계대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성실한 완벽주의자로의 면모가 무대에서 빛난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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