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 -우리들 마음의 고향, 그림같은 풍경스케치 -발로 뛴 남민의 탐방기, 소울메이트 2014년
[헤럴드경제=김영상 사회부장] 당나라에 유학한 당대 문장가인 ‘신라의 지성’. 학자이자 정치가인 최치원(崔致遠)은고국에 돌아와 개혁정치를 표방했지만 세상은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최ㆍ치ㆍ원이라는 이름 석자를 온세상에 떨쳤지만, 신라의 기존 세력 앞에서 그의 개혁은 ‘이상’으로 폄하됐다.
최치원이 인생에서 마지막 웅지의 꿈을 한창 펼칠때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 최치원은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ㆍ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ㆍ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ㆍ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혐오스런 중앙정치를 벗어나 백성들 옆에서 민생을 실천한 시기다.
특히 천령군(함양) 태수 자리는 애착이 컸다. 당시 천령군은 비가 오면 홍수가 났다. 장마 때면 죽는 이들이 많았다. 최치원은 묘수를 찾아냈다. 군 중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곳에 나무를 심고 둑을 쌓았다. 지금의 함양 상림(上林)이다. 현재 상림의 면적은 20만5842㎡로, 천연기념물 제154호다.
상림이 조성된 후 천령군 사람들은 홍수 걱정은 안해도 됐다. 이곳에선 훗날 태수를 칭송하는 노래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1000년이 지난 지금 함양 사람들도 최치원을 칭송한다.
하지만 천령군도 최치원의 정착지는 되지 못했다. 태수로 백성의 가려운 등은 긁어줬지만, 병들어가는 신라를 개조하기엔 너무 힘이 달리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초연했다. 모든 것을 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합천 가야산 품속 해인사가 있는 동네였다. 그곳은 풍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도선국사가 ‘최고의 풍수 땅’으로 예찬한 곳이기도 하다. 그 마을로 들어온 최치원은 홍류동 계곡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고,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며 말년을 지냈다.
유유자적하던 어느날, 스님과 지인들 앞에서 지팡이를 꽂았다. 그리곤 “이 나무가 살면 내가 가야산 신선이 된 줄 알라”고 했다. 이 지팡이는 천년의 나무가 됐다. 이후 최치원의 흔적은 없다. 혹자들은 지팡이가 살아난 것과 관련해 “최치원은 신선이 돼 하늘로 날아갔다”고들 했다. 한때 누구보다 컸던 정치적 야심, 그 속에서의 좌절과 분노, 삶의 회한 등을 다 묻고 떠난 것이다. 그가 신선이 됐는지, 안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욕칠정’에 연연하지 않는 평화, 좀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해탈’은 마음의 고향에서 얻을 수 있는 평정심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야산 품속 해인사가 있는 동네는 십승지 중 하나다. 이 마을에서 최치원은 욕심도, 회한도 남기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합천 가야는 그에게 마음의 구원, 즉 요즘 말로 ‘힐링’을 선물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고향,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이상향인 ‘십승지’를 찾아 떠난 여행이 책으로 나왔다. 옛 선현들의 발자취를 찾아 사색하고 오늘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책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2014년 3월6일ㆍ소울메이트ㆍ317 페이지ㆍ1만6000원). 저자는 남민이다. 헤럴드경제 기자다.
저자는 “십승지란 일종의 ‘피신처’다. 즉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을 말한다. 전쟁이 나도 안전한 곳, 흉년이 들지 않는 곳,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3가지의 조건을 갖춘 십승지마을 10곳을 탐방했다.
합천 가야를 비롯해 영주 풍기, 남원 운봉, 무주 무풍 등 십승지 마을의 얘기를 담았다. 저자는 강조한다. “지리적 특수성과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 곳, 그리고 휴양지로서의 역할까지 겸비하고 있는 이 지역들을 탐방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책 겉장에 소개돼 있는 부제목 ‘역사와 힐링이 만나는 한국인의 이상향 테마여행’이라는 글을 보면 저자의 의도가 좀더 명확해진다.
감히, 말하지만 이 책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못잖은 스토리를 담았다고 본다. 세밀한 역사적 고찰이 그렇고, 풍부한 감성과 진귀한 스토리가 그렇고, 우리들 마음의 고향을 제시해줬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문화유산 답사기가 여행기 속에 애국심을 고취한 측면이 있다면, 십승지마을은 그냥 우리가 옛날 살았던 고향과의 추억을 연결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남민 기자가 처음 십승지마을 책을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주말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무작정 발길이 닿은대로 떠난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여행지를 글로 채색했고, 십승지마을을 탐방하는 강행군을 펼쳤다는 것은 나중에 들은 얘기다.
그러다보니 그의 글은 수묵화다. 파스텔톤의 수채화도, 화려한 유화도 아니다. 발길 닿는대로, 생각 나는대로 찾은 마을에서 스토리를 만나고, 감성을 발굴하면서도 담담한 톤을 유지했다. 수사적 표현이나 칭송은 그래서 없다.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는 책은 그래서 붓으로 담담하게 그리다보니 절제된 흑백톤을 유지했다.
담담함은 오히려 흥미를 유발한다. 담담함은 여백이 있다. 그가 수묵화로 그린 십승지마을의 또다른 전설을 찾아 떠나고픈 욕심이 드는 것은 그가 남긴 여백 때문일게다.
남민 기자의 책은 단순히 지역 명소를 소개한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옛이야기와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생한 경험담 등을 수록해 다른 여행서와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 특히 각 지역의 특산물과 주요 명소를 담은 풍부한 사진은 독자들에게 읽는 맛을 더한다. 저자의 남다른 관찰력과 세심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저자 남민은 욕심(?)을 부린다. 이번 십승지마을 여행기가 자신의 종착지는 아니라고 한다. 또 주말이면 여행을 떠나고, 낯선 곳에서 탐구의 눈길로 그곳을 해부하면서 또다른 여행기를 준비할 것이다. 그의 또다른 힐링 여행은 그래서 더욱 더 기대가 된다.
이 책에 눈길이 가는 것은 최근 어지러운 세상과 관련이 크다. 생활고로 자살하는 인생이 많은 세상, 성폭력 등 각종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 그런데도 정치권을 비롯한 지도층은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세상. 우울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좌절감이 커져만 갈 때, 이같은 힐링여행 책의 가치가 더욱 커지는 것은 아닐까.
답답하다면 십승지마을로 여행을 떠나보자. 속박없이 그냥 훌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 게 좋다. 그리고 저자가 말했듯이 내 마음도 비우고 떠나보자. 소유한 물건을 갖고 간다는 것은 세상 번뇌를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니까. 다만 목적지 없이 떠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면, 십승지마을 책 한권 쯤은 동행자로 택해도 좋을 듯 싶다. 저자 남민이 쓴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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