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KBS 1TV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피버디상을 받았던 이욱정 PD가 오랜만에 새 다큐멘터리 ‘요리인류’를 들고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이 PD에겐 별칭도 생겼다. ‘셰프 PD’가 그것. 돌연 휴직계를 던지고 르코르동블루로 유학을 떠나 ‘프로요리사’ 명함을 들고 온 덕분이다. 전세금과 마이너스통장을 탈탈 털어 떠났던 런던 유학길의 이유는 하나였다. “음식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PD가 요리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것이 내내 불편했다”는 것이다. 500일의 유학 후엔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작 기간 2년, 총 제작비 24억원이 투입된 푸드멘터리(푸드+다큐멘터리) ‘요리인류’를 내놨다. LG전자의 적극적인 제작 지원으로 기획된 ‘요리인류’는 4K 카메라로 촬영돼 기존 HD 콘텐츠보다 4배 선명한 UHD 콘텐츠로 제작됐다는 점이 큰 자랑이다. ‘먹방(먹는 방송)’ 열풍에 편승한 ‘먹방 다큐’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접근은 ‘인문학’적 관점으로 이뤄졌다. 어린 시절부터 먹는 걸 좋아하고, 대학원에서 인류학 석사 과정을 밟았던 이 PD의 취향과 관심이 만나 태어난 다큐멘터리다. 이 PD가 요리유학길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쿠킹 스튜디오’를 오픈하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기획된 ‘요리인류’는 전 세계 45개국 촬영을 거쳐 비로소 완성됐다. 지난 22일 서울 상수동에 위치한 ‘요리인류’ 쿠킹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의 후반 작업에 한창이던 이 PD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요리는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단이에요. 인류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욕망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요리의 개념을 확장해 빵, 향신료, 고기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이어질 다큐멘터리에선 생전 처음 만나게 될 레서피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요리가 등장하지만, ‘요리인류’는 요리 자체보다는 “음식의 세계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녹아있다.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것 이상으로 인간이 훌륭한 요리를 하는 동작 자체의 아름다움”도 접근 대상이었다.
특히 이 PD는 요리와 인류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살아남아 번창할 수 있었던 음식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셰프PD가 설명하는 그 공통점은 네 가지였다. 보존성과 휴대성, 적응력과 감성이다. “인류는 수만가지의 레서피를 개발했지만 시공을 넘어선 지금 몇 안 되는 음식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생존하고 번창한 음식엔 공통점이 있어요. 오늘날 기업이 살아남은 방식과 닮아 있죠. 음식이든 상품이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 향유하는 사람들의 니즈와 트렌드에 부합하지 못하면 사라지고 도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햄, 육포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달할 수 있었던 육가공품은 보존성과 휴대성을 잘 보여주는 예다. 이동이 많았던 인류사에서 “간직할 수 없는 음식은 도태됐다”는 이 PD는 “같은 밀가루를 통해 조리된 음식이지만 유목민들이 국수 대신 빵을 소비했던 것은 간편히 가지고 다닐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제품에 빗대 생각한다면 보존성은 곧 내구성”이라는 것이 이 PD의 설명이다. 지역, 문화권마다 각양각색인 밀음식은 요리의 ‘적응력’을 보여준다. “한 예를 들자면 인도에서 빵은 ‘난’의 형태로 바뀌었다. 손으로 먹은 식문화권에선 납작한 빵이 인기를 끄는데, 이는 그릇 대용으로 쓰여 수프를 담아 먹을 수도 있게 한 용도였다”고 그는 전했다. 밀음식의 적응력을 보여주는 사례는 1부 ‘빵과 서커스’ 편에서 유목민들이 잿더미 안에서 구워먹은 빵을 구워먹는 장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리의 마지막은 ‘감성의 자극’이다. “고대 이집트문명이 탄생한 이후 빵은 수만명의 노동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자, 정권통치의 수단이었지만 현재 제과제빵의 세계는 완벽한 디자인으로 사람의 마음을 끈다”고 했다. 이 PD는 “국수는 가늘고 기다란 면발의 형태와 국수를 빨아들일 때의 촉감, 먹는 소리가 어우러져 감성을 일으킨다”며 “더 맛있고 미학적인 음식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가 인류의 문화였다”고 해석했다.
이 4가지를 충족하지 못한 요리는 결국 도태되는데, 이미 공개된 티저영상에서 5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빵과 서커스’ 편에 등장할 카스도스가 카스테라와의 싸움에서 완패한 것이 그렇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설탕가루를 흥건히 묻혔던 지나친 단 맛과 계란 노른자 특유의 비린내가 품은 이 빵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재미난 카스테라의 한 종류로만 남게 됐다”는 것이다. 이 PD는 “인간이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읽는 요리를 통해 시대의 트렌드를 이해하는 법이 ‘요리인류’ 안에 담겨있다”며 “급속도로 사라져간 레서피와 한 문화권 안에서 지속돼온 요리들의 수천년 노하우와 지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프로그램에 대해 전했다.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은 다큐 PD의 차기작답게 ‘요리인류’는 벌써부터 해외 시장에서 관심이 많다. 방송 전 이미 홍콩 TVB에 선판매됐고, 이 PD는 중국 CCTV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 ‘누들로드’를 접한 이후 ‘혀끝의 중국’이라는 푸드멘터리를 제작했던 CCTV가 ‘요리인류’의 티저 영상을 본 뒤 한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자는 제안을 해와 고심 중”이라고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밝히며 ‘다큐 한류’의 가능성도 열어뒀다. 편당 3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8부작 ‘요리인류’는 26일 오후 10시부터 28일까지 총 3편( ‘빵과 서커스’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 ‘생명의 선물, 고기’)을 방영하고, 올 하반기 5편( ‘세상의 모든 빵’ ‘매혹의 요리-카레’ ‘불의 요리-바비큐’ ‘실험적인 요리를 다루는 쿠킹 스페셜’)이 방송된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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