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순식 기자] 바야흐로 금융의 격변기다. 초저금리 기조 속에 은행들은 예대마진에 기반한 오랜 관행을 떨쳐내기 바쁘다. 지점이 없는 인터넷은행 출범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얼굴을 보지 않고 계좌를 열고 대출을 실행하는 핀테크 기술이 보편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각 은행들의 전통과 역사의 바탕을 이루는 본점이다. 중앙은행과의 인접성, 풍수상의 요인, 업의 특성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기업 문화 등으로 은행은 결코 본점을 쉽게 옮기지 않는다. 다만, 은행의 흥망과 인수합병에 따라 본점이 바뀔 뿐이다.
현재 시중 은행의 본점은 남대문과 명동, 을지로, 여의도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들 본점은 IMF 외환위기 등을 거치며 은행의 흥망과 합종연횡의 거친 풍파를 거치며 살아남은 은행의 산실이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 승자의 논리에 의해 다시 그려진 은행 본점 지도= 예로부터 은행 본점은 사실상 명동 독식 구도였다. 자산과 규모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은행들을 압도하며 ‘조상제한서’(조흥ㆍ상업ㆍ제일ㆍ한일ㆍ서울)라 불리던 옛 5대 시중은행들이 명동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
옛 남대문로 3가에 있는 한국은행을 시작으로 2가 주변에 상업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 국민은행 등이 있었다. 같은 길을 따라 하나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까지 대부분 은행의 본점이 남대문로를 끼고 몰려 있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와 금융업의 부침에 따라 이 구도는 크게 변화했다. 살아남은 은행, 그리고 인수합병에서 승리한 은행 중심으로 본점 지도가 크게 변화한 것.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합병된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본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합병으로 탄생한 우리 은행은 명동에서 살짝 벗어난 회현동에 둥지를 틀었다.
역시 남대문로에 있던 옛 제일은행 본점은 지난해 신세계에 매각되기도 했다.
인수와 합병 과정을 거치며 도심 본점 지도는 현재 남대문 인근 태평로의 신한은행 본점, 중구 회현동의 우리은행, 을지로의 KEB하나은행과 IBK기업은행 등으로 재편돼 있다.
은행 본점 지도의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지난해 외환은행과 합병한 KEB하나은행은 옛 외환은행 사옥을 현재 본점으로 사용 중이다. 하지만 외환은행 본점의 유효기간은 앞으로 약 2년이다.
2017년 KEB하나은행의 본점이 을지로1가의 옛 하나은행 본점 자리로 다시 옮겨지기 때문. 현재 이 부지는 한창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지하 6층, 지상 26층, 연면적 5만4038㎡ 규모의 대형 첨단 업무시설이 오는 2017년 6월 세워진 뒤 KEB하나은행 등 하나금융지주 계열사들이 일제히 모인다. 이를 위해 하나금융그룹은 지난 1999년 하나은행이 보람은행을 흡수 합병한 후 20년 가깝게 소유하던 하나은행 별관 매각에 착수하기도 했다.
▶ 나홀로 여의도ㆍ탈 강남 농협= 국민은행은 유일하게 주요 시중 은행 가운데 도심이 아닌 여의도를 본점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정확한 의미의 통합 본점은 아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장기신용은행이 합쳐진 현 국민은행은 이들 건물의 옛 본점 자리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통합본점에 대한 국민은행의 열망은 대단했으며, 본점 매입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 2001년 합병 당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노조는 통합은행장, 통합은행명, 통합은행 위치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그러다 통합은행 본점을 당시 매물로 나온 서울 역삼동 현대 아이타워로 이전하자는 계획이 심각히 논의됐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통합본점을 SC제일은행 본점 옆 종로 재개발지역에 신축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협상에 실패했다. 그 전에는 서울역앞 대우센터빌딩 인수전에 나섰다가 탈락했다.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SIFC)도 통합 본점 후보지로 검토됐으나 역시 무산됐다.
결국, 지금도 동여의도, 서여의도, 명동 등 세군데로 나뉜 세 집 살림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지난해 KB금융지주가 여의도 본점으로 이전하며 여의도 통합본점에 무게가 실리는 양상이다. KB금융지주가 사용하고 있는 명동 본점은 1960년대 국민은행 본점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난 2008년 설립 이후 KB금융지주가 줄곧 사용해 왔던 건물이지만, 주전산기 사태로 극심한 내홍을 겪으며 새롭게 취임한 윤종규 회장이 은행장을 겸임함에 따라 은행과 지주사의 협업 필요성이 커지면서 사무실 이전까지 이뤄지게 됐다.
시중은행은 아니지만, 상호금융에서 이제 1금융권의 규모로 커져 있는 농협의 본점 스토리도 흥미롭다. 농협은 본래 강남에 중앙회 사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999년 12월 완공과 동시에 재무구조 개선과 중복자산 매각의 목적으로 공개매각의 운명을 맞게된다. 이는 2000년 11월 현재 현대차그룹에 매각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특혜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유찰돼 매입가격이 크게 낮아졌고 매매대금도 50%만 내고 나머지는 5년간 나눠 내는 조건이었다. 농협은 2000년 1월 공매를 시작했지만 여섯 차례나 유찰되면서 그해 11월 2300억원에 현대차그룹이 낙찰자로 선정된 바 있다. 또, 당시 매각 과정에서는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이 현대차로부터 3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2007년 대법원에서 특가법상 뇌물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서대문역 인근 새문안로에 터를 잡은 농협중앙회는 가파르게 오른 양재동 사옥의 가치에 크게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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