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회> 죽음의 계곡 14
위대한 사상은 결코 책상 앞에 편안히 앉아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일수록 그 배후에는 격한 노동이나 힘든 고통이 깔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동이나 고통은 사상의 어머니와도 같다.
그렇다면 사상의 기반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깨우침이다. 아무리 1학년 3반 삼식이라도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된다면, 그는 그 순간에 이미 사상가의 반열에 올라앉게 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로 따져보면 이 세상을 주름잡던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들도 사실은 별것도 아닌 셈이다.
‘그렇지.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 없이 몸을 던지면 되는 거야. 남에게 강요해서라도 내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달리면 되는 거라고.’
드디어 권도일이 깨우침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는 말 달리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 박성애를 일으켜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온몸에는 아직도 땀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 긴 머리카락이 올올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성애 씨, 어서 옷 입어요. 이 방으로 불러올 사람들이 있어.”
“지금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요? 침대가 이렇게 헝클어졌는데?”
“침대야 대충 정리하면 되지. 마침 욕실은 쓰지 않았으니 깨끗할 테고….”
“우리 둘이 연애한 흔적은 어떻게 지워요? 머리카락도 수세미처럼 됐을걸요?”
“괜찮아요. 서로 다 아는 사실인데 뭘.”
“서로 다 알아요? 아까 술집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맞아. 그러니 어서 옷이나 입어요.”
“싫어, 몰라. 난 먼저 나갈래요.”
“괜찮다니까?”
권도일은 이렇게 말하며 구내전화기를 들어 도종호와 송달민을 찾았다. 그들은 좌, 우 옆방에 각각 투숙 중이었다. 아직도 파트너들과의 사랑놀이가 끝나지 않았는지 수화기를 통해 여인들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박성애는 샤워도 하지 않은 채로 급히 옷을 챙겨 입더니 대충 립스틱만 바르고 방을 빠져나갔다.
“지금 당장 만나자고요? 연애하다 말고?”
“그래요. 당장 만납시다. 1분 내로 제 방으로 오세요. 시간 재겠습니다.”
“1분이라니요? 샤워도 해야 하고, 옷이라도 입어야 갈 수 있잖습니까?”
“글쎄, 알몸으로 오셔도 좋으니 당장 보잔 말입니다. 시간 잰다고요.”
권도일은 이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역시 깨우친 자의 태도였다. 남에게 강요해서라도 내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달려야 한다는 깨달음… 그는 이 깨달음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셈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 깨달음이야말로 거성자동차와의 싸움에서 헤게모니를 움켜쥐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강력하게 요구하기!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사정에 절대 매달리지 않기… 이야말로 좀 전에 방을 뛰쳐나간 박성애로부터 얻은 깨달음이었다. 화류계 초년병인 그녀는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던가? ‘살살 잡아요’, ‘손바닥으로 굴려요’, ‘지금은 혀를 써야지요’, ‘왼쪽 핥아!’, ‘오른쪽 빨아!’…
그녀의 막무가내 식 강요에 권도일은 쩔쩔매지 않았던가. 무릎을 꿇고, 엎어지고, 잦혀지고… 그렇지만 막상 오르가슴의 쾌감을 얻은 쪽은 박성애였다. 바로 그것이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꽃값을 지불하는 손님이든 뭐든 간에 명령부터 내리고 볼 일이다.
그때 아랫도리에 수건만 걸친 도종호와 송달민이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척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역시 명령하는 대로 씨가 먹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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