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회> 날개에 숨긴 칼 50
5대륙 관통 랠리 경기를 앞두고 거성자동차에서 이토록 무지막지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호성은 빨간 고쟁이 한 장만 걸친 채로 종일토록 현성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고, 지갑도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시골 여관방이라 해도 전화기는 갖추어져 있었지만 문제는 아무런 전화번호도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거였다. 하다못해 집 전화번호도 떠오르지 않았으니 졸도할 노릇이었다.
“이거 단축번호가 문제로군. 휴대폰 단축번호만 떠오르지 실제 전화번호는 전혀 기억나질 않아. 아이고, 머리통에 쥐나네.”
그렇다면 인근 500미터 전방 목욕탕에 들어앉아 있는 김지선은 어떠할까? 그녀 역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역시 단축번호로만 입력시켜 놓은 결과였다. 114에 물어서 유민제련그룹 본사로 전화를 해볼까? 그래서 유호성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물어볼까? 하다가 곧 머리를 설레설레 젓고야 말았다. 전화번호를 알아낸들 그 역시 휴대폰이 없으니 받을 재간도 없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샥씨, 목간통에 사용료 내고 얼렁 나가시오. 무신 생각얼 그로코롬 짚이 허고 자빠졌다요? 그렇당께, 돈도 없구먼. 내 눈은 못 속인단 말이여.”
목욕탕 주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그쳤다. 하긴 얼굴만 반지르르한 서울 여자가 온 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 들어올 때부터 의심스럽긴 했었다. 그런데 저녁 내내 기다리라고만 할 뿐, 그까짓 목욕료 6,000원을 떼어먹으려 하니 열이 받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물며 영업시간이 끝나 퇴근하려고 해도 입고 나갈 옷이 없다며 버티는 통에 약이 바짝 올라 있는 중이었다.
“아줌마, 잠깐만 기다리면 옷이며 돈이며 잔뜩 싸들고 찾아 올 거예요.”
“아이고,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리 고만 허씨요. 하긴 똥줄 타게 도망질 칠래도 입을 게 없어서 그리 못 허긴 허겄소. 나가 샥씨를 딱 본께로 바람맞은 것이 틀림 웂겠소. 이 시간이면 누구든지 돈을 싸들고 와야 헐 것인디, 어째 요렇코롬 냅둘 수가 있겄습디여?”
김지선은 그만 눈물을 질금 흘리고야 말았다.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겨우 돈 6,000원 때문에 낯선 타지의 목욕탕 여주인에게 망신을 당하다니…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던 까닭은 목욕탕 주인을 비롯하여 종업원들 모두가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 때문이었다.
“호성 씨, 나 어떡해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어보아도 소용없었다. 옆의 남탕에서는 벌써 청소를 시작했는 지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물 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완력 넘치는 소리로 가늠해 보아도 청소하는 사람은 억센 남자들임에 틀림없었다.
“어머나, 어머나 이를 어째.”
슬며시 문을 열고 내다보니 여탕 홀에는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악을 쓰던 목욕탕 주인도 어느새 퇴근한 모양이었다. 서둘러 퇴근한 것을 보니 어쩌면 그 아줌마는 목욕탕 주인이 아니라 고참 종업원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불안하긴 매일반이었다. 이제 잠시 후면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들이 여탕 청소를 하기 위해 우르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김지선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여탕 홀 내부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몸에 걸칠만한 여벌 옷가지라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리도 알뜰하게 정리했는지… 사용한 수건은 자루에 담아 꽁꽁 묶어서 문 밖으로 내놓은 상태였고, 하다못해 탁자에 놓여있던 신문지마저도 끈으로 묶어 밖에 내놓은 후였다. 혹시 목욕탕으로 들어올 때 몸에 친친 감고 있던 붕대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이미 그 붕대는 쓰레기로 분리되어 배출 처리된 지 오래였다.
“엄마….”
결국 그녀가 간절히 찾은 사람은 엄마였다. 자기를 무인도에서 구출하여 이곳 목욕탕까지 데리고 온 현성애의 얼굴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녀를 애타게 부를 수도 없었다. 한편, 500m 떨어진 여관방의 유호성은? 오십보백보! 빨간 고쟁이 한 장만을 걸친 그의 마음도 김지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유호성은 밤을 새운다 해도 쫓겨날 염려가 없다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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