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미운 캐릭터’다. 자신감이 넘쳐흘러서 자신이 하는 나쁜 짓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집도 세서 일을 잘 밀고나가는 추진력은 있다. 그 방향이 옳은지는 잠시 제쳐 두더라도. 현대 사회가 낳은 ‘괴물’, 13일 개봉하는 영화 ‘트릭’에서 시청률에 중독된 방송국 다큐멘터리 PD를 연기한 배우 이정진(38)을 만났다.

잘생긴 얼굴, 해사한 미소로 줄곧 ‘훈남’ 역할만 맡아 왔다.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섬뜩한 남자를 연기한 ‘피에타’(2012)도 있었지만,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에서는 시종일관 “일편단심” 아니면 “그냥 착한 애”였다. ‘트릭’은 ‘피에타’ 이후 이정진의 4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이정진이 연기한 다큐멘터리 PD ‘석진’은 ‘쓰레기 만두 파동’ 사건을 보도해 일대 파장을 일으켰지만 곧 오보로 판명이 나 보도국에서 퇴출당하는 인물. 이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나 교양국 PD로 복귀한 석진은 휴먼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화려한 재기를 꿈꾼다. 실제 폐암 환자와 그를 간호하는 부인의 이야기를 그린 ‘병상일기’라는 프로그램은 매회마다 시청률 신기록을 경신하면서 석진을 ‘시청률 중독’으로 몰아간다. 석진은 슬금슬금 방송 조작의 유혹에 넘어간다.

“석진이라는 인물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남이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다보니 시청률에 목을 매는 거죠. SNS에 중독된 사람들처럼요. 사람들은 SNS에 자기가 좋은 것보다 남들이 ‘좋아요’를 눌러줄 만한 걸 올리잖아요. 석진도 그러다보니 괴물처럼 변한 거죠.”

배우 하정우가 테러범과의 전화 통화를 독점 생중계하는 내용의 ‘더 테러 라이브’(2013)나 제이크 질렌할이 뉴스 특종을 잡으려고 무슨 일이든 벌이는 PD로 분한 ‘나이트 크롤러’(2015)처럼, 방송가의 이면을 다룬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이정진은 ‘트릭’ 시나리오의 매력에 대해 “‘이게 대한민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주인공이 대한민국에서 영향력 있는 방송국의 PD이지만, 방송국도 어떻게 보면 작은 회사잖아요.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잘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회사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요. 여러 사람이 모이면 ‘아 그렇게까지 해’라고 하면서도 잘 나가는 걸 보면 그 팀에 들어가고 싶어 하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에게 물건처럼 가격표가 붙는 상상을 해 봤어요. 이 사람은 연봉 얼마짜리, 이렇게요. 그랬더니 ‘아 나라도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갖게 되더라고요.”

영화 ‘접시꽃 당신’(1988)으로 데뷔해 어느덧 배우로 살아온 지도 열여덟 해. 그가 연기한 인물의 극중 대사처럼 “방송은 마약과도 같고, 인간이라면 버릴 수 없는 욕망의 집착”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까.

“드라마를 하다 보면 시청률 압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전혀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에요. 영화는 관객수와 BEP(손익분기점)이라는 명확한 숫자가 있고 드라마는 최소한의 시청률이 있잖아요. 출연진인 저에게 당연히 책임감이 있는 거죠. 다음 작품을 가야 되는데, 낮은 수치가 계속 가면…. “몇년 만에 복귀해요”하고 인사 하게 되겠죠?” (웃음)

그도 오랜 배우생활 동안 방송국이라는 조직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해 경험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교양국이나 예능국보단 드라마국을 훨씬 잘 알죠”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이 연기를 준비하며 공부한 것은 외국의 다큐멘터리들.

“감독님이랑 실제 사례를 많이 찾았어요. 몇 년 전 외국 유명매체에서 동물 다큐를 오랜 시간에 걸쳐 찍었는데 알고 보니 동물들을 낚싯줄로 묶어놓고 찍었더라고요. 그런데 지구촌 수많은 사람은 그 영상들에 열광했었던 일이 있더라고요.”

이정진은 꾸준히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사진작가’이자 상업적인 ‘사진가’로서도 보폭을 넓혀 왔다. 네팔이나 케냐 등 저개발 국가에서 찍은 사진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 CSR 필름페스티벌에서 케냐 봉사활동을 촬영한 영상으로 국제협력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배우 선생님들의 사진을 찍어 방송국에 거는 것”을 목표라고 말했다. 올해 섭외를 마무리하고 내년부터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지금 방송국에 가면 자사 프로그램 중에 잘 됐던 작품이나 지금 하는 프로그램들의 사진을 걸어 놓잖아요. 그런데 이 방송국이 잘 된 데는 우리 배우 선생님들의 노고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후배 배우이자 사진작가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이에요.”

이정진은 한때 ‘유망주’ 타이틀의 배우에서 ‘스타’로 엄청난 고속상승을 하진 않았지만, ‘안정적인 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그의 연기 곡선이 “감사하다”고 했다.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게 저는 참 감사해요. 좀 있으면 20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오랜 시간동안 옆에서 본 사람들 중에 엄청나게 고속으로 올라가셨던 분도 있고, 그렇게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엄청나게 올라간 만큼 엄청나게 떨어진 사람도 봤죠.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는 “인생으로 봤을 땐 지금이 정점”이라고 말했다.

“1m씩이라도 올라와서 저는 늘 지금이 제일 좋거든요. 경비행기처럼 천천히 올라왔기 때문에 잘 가는 것 같아요. 경비행기는 시동이 꺼져도 날아요. 불시착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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