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와 ‘러브픽션’, 두 작품으로 단숨에 한국영화계의 주목받는 제작자로 떠오른 삼거리 픽쳐스의 엄용훈 대표(46)는 요새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들어오는 젊은이들의 질문으로 유명세를 실감하곤 한다. 그 중에는 “저는 영화전공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오지도 못했는데요,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오는 친구들도 있다. 그때마다 엄 대표의 답은 짧다. “저는 고졸이거든요.”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다. “허걱”이거나 “더 존경하게 됐다”거나. ‘고졸’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두 가지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엄 대표는 “영화계에선 저를 중앙대나 동국대, 한양대, 서울예대, 심지어 서울대 출신으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며 “숨기지는 않았지만 제게 직접 묻지 않는 한 굳이 학벌을 밝히지는 않아왔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약 30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를 자신의 줄로 세우려는 사람들이 간혹 무슨 학교에서 무슨 전공을 했냐고 물어 ‘상고 졸업했다’고 답하면 예의 대화가 끊기거나 다른 화제로 돌리곤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엄 대표의 말이다.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m.com 2012.03.09\r\n삼거리픽처스 엄용훈 인터뷰.\r\n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m.com 2012.03.09
사회적 영향을 크게 끼친 웰메이드 영화의 제작과 흥행의 비결, 살아온 내력이 궁금해 찾아간 서울 신당동 삼거리 픽쳐스의 엄 대표 사무실 칠판엔 차기작의 준비상황과 함께 “똑같은 논리와 전략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이 ‘성공의 복수’” “우물의 깊이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포기했느냐 포기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하다” “실패는 두렵지 않다! 경험을 기초로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사고. 도전정신이야말로 기업가 정신” 등의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 끝엔 영화 대사를 인용한 우스개 담은 결의가 덧붙여져 있었다.
“‘러브 픽션’ 흥행 성공을 위한 금연 결의를 지키지 못할 세 가지 상황은? 죠스의 습격, 킹콩의 방문, 그리고 ‘러브 픽션’의 1000만관객 달성!”. 엄 대표는 “3개월째 금연중”이라고 했다.
엄 대표는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영화계에서도 ‘비주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4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빌딩 청소나 식당일을 하시는 어머니께만 의지하기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꿈꾸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직장 잡아서 가계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에 경기상고 3학년 재학 중 취업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공사현장 짐지게를 져본 엄 대표는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해외운송회사 통관업무로 시작해 상장사 재무 담당으로 10여년을 보냈다. “진급 심사에서 1등을 하고도 학력 때문에 번번히 미끄러지자 임원들이 ‘등록금은 댈 테니 어디서라도 졸업장을 따오라’고 했지만 돈으로 학력을 사기 싫어 거부했다”고 말한 엄대표는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 지금 방통대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이다.
엄 대표는 “내 인생 10년마다 새롭게 디자인한다”는 결심으로 90년대 후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던 중 벤처열풍이 불었고 지인들의 부름으로 투자컨설팅업에 합류했다. “다양한 업종과 회사들, 사람들을 경험했고 수많은 ‘한방 인생’과 달고 쓴 곡절들을 목격했다”고 엄 대표는 떠올렸다. 투자결정과 인수합병 등을 주로 했던 업무로 한때 상상키도 어려운 고액 수입을 올릴 때도 있었지만 “쉽게 벌어 다시 쉽게 투자해서 결국은 남는 게 없는 게 없다”고 할만큼 금융, 투자업이라는 게 휘발성이 강했다.
그래서 세번째 10년은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을 하자”고 마음 먹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자취를 남기는 일”을 하자는 생각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내 역할은 무엇일까, 아빠로서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라는 질문이 화두였다. 인생의 방향타는 예기치 않게 영화로 흘렀다. 투자컨설팅의 고객이었던 영화사가 인연이 돼 2000년대 중반 LJ필름과 프라임엔터테인먼트로 자리를 옮겼고, 2008년 제작사 삼거리 픽쳐스를 차려 독립했다.
그러던 차에 공지영의 ‘도가니’를 만났고 ‘러브픽션’의 전계수 감독과 의기투합했다. 사실상 창립작으로 준비했던 ‘러브 픽션’의 투자가 난항을 겪으면서 3년여간 프로젝트가 표류하자 엄 대표는 37개월간 아내와 3남매를 월세 단칸방으로 옮겨야 했다. 그 와중에도 아내가 전세자금으로 마련한 돈으로 원작 판권을 사며 영화사의 라인업을 늘려갔다.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나 “아빠, 영화 안하면 안 돼? 왜 우리 가족은 점점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 좋아져?”라고 했던 아이들에겐 늘 미안하고 고맙다. 엄 대표는 ‘도가니’나 새로운 연애담으로 호평받은 ‘러브 픽션’ 등 작품과 개인철학, 영화사의 색깔을 관통하는 것은 “‘반권위주의’와 영화의 사회적 가치”라고 말했다. 벌써 5~6편의 차기작들을 기획 중인 엄 대표의 수중엔 이주 여성들의 한국살이를 담은 경쾌한 코미디 ‘나는 한국인이다’와 한 가족의 눈물겨운 불황 극복기를 다룬 영화 시나리오가 들어있다.
엄 대표는 “후배 사무실 한 켠에서 시작한 영화사 사무실에선 늘 삼거리가 바라보였다”며 “거리와 거리가 교차하니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가 만나게 된다, 그 속에는 놀거리, 볼거리, 재미거리가 있다”며 사명을 설명했다. 인터뷰 말미에 팬과 관객들이 줬다며 ‘도가니’라고 선명하게 찍힌 와인 한병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엄 대표의 웃음이 밝았다.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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