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동통신사, SK텔레콤이 있기까지
84년 텔레커뮤니케이션팀 신설 美선진기술 습득 사업기반 닦아 92년 제2이동통신 진출 도전
94년 4000억 막대한 자금쏟아 한국이동통신 인수 대승적 결정 CDMA 이동통신 세계 첫 시작
‘지난 1994년 7월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선경은 한국이동통신의 경영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97년 3월 한국이동통신은 SK텔레콤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SK의 정보통신 사업과 관련된 짤막한 두 줄짜리 사사(社史)이지만 시작은 치밀하고 치열했다. 순탄한 듯 보였던 과정은 외압에 휘말리며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고, 뼈를 깎는 결단이 뒤따랐다. 지금의 창대한 결과를 위한 고통스러웠던 과정도 최종현 회장의 통 큰 결단력과 대승적 자세로 비장미가 있었다고 후대는 기억하고 있다.
시간을 되돌려 1980년대 초반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가 가시화되던 때, 최 회장은 다음 장기경영 목표로 정보통신 사업을 정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법적ㆍ제도적 여건이 구비돼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 회장은 미래 비전을 본 것이다.
첫 걸음으로 1984년 미주 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했다. 정보통신 사업 선진국인 미국이 보유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1989년에는 미국 뉴저지 주에 현지 법인 유크로닉스를 설립, 미국 내 정보통신 관련 기술 조사와 용역 제공을 담당했다. 1990년 미국 CSC 사와 합작으로 선경정보시스템도 설립했다.
대한텔레콤의 전신인 선경텔레콤은 1991년 설립돼 선경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 기반의 한 축을 구축했다. 선경텔레콤은 정보통신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 용역, 교육 훈련, 컨설팅 사업 등을 벌였고 이듬해 6월 대한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참여하게 된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위한 사전 작업이 한창이던 1990년 7월 체신부는 ‘통신 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이동통신 분야에 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큰 뼈대였다.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과 경쟁할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의미로, 재계의 판도를 바꿀 일대 사건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6공 최대의 이권 사업’으로 불리며 현대 삼성 금성 대우 등 설비 제조업체는 배제된 채 선경 포항제철 코오롱 동양 쌍용 동부 등 6개 기업이 뛰어들었다.
선경의 대한텔레콤은 1992년 6월 20만쪽에 달하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1차 심사에서 총점 8.127점으로 1위를 차지하는 등 그 해 8월 압도적인 차이로 제2이동전화 사업 최종 허가 대상 법인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였던 점이 ‘선경 봐주기’였다는 음해성 소문으로 확대됐다. 최 회장은 “선정 과정이 정치적으로 문제시되고 부당성이 증명되면 정부의 어떤 결정도 받아들이겠다”며 “사업자 선정이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더라도 선경은 사업권을 획득할 실력이 있다”고 정면 돌파를 택했다.
하지만 여론을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최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오해야, 오해”라고 외쳤지만 여론을 거스를 순 없었다. 선경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백지화하고 다음 정권에서 재추진키로 결론 내렸다.
새로운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정권이 바뀐 뒤 1993년 12월 체신부가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나선 것. 그러나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체신부는 민간 자율로 단일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한국이동통신의 지분도 동시에 매각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구성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 회장은 대승적 결정을 내려 4000억원 안팎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한국이동통신 인수 결정을 내렸다. 10여년간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목표로 전력 질주해왔지만 전경련 회장으로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놓고 포항제철이나 코오롱과 경쟁할 수 없다는 대의를 지킨 것이다.
전경련 회장단은 최 회장의 결단에 경의를 표했고, 한국이동통신 인수를 적극 지원했다. 결국 1994년 1월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지분 23%를 4271억원에 인수했다.
선경이라는 새로운 우군과 만난 한국이동통신은 날로 비상했다. 1996년 1월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시했고, 그 해 6월에는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S&P로부터 당시 세계 이동전화 사업자 가운데 최고 신용 등급인 ‘A+’를 받았다.
국영 기업인 포항제철과 동일한 신용 등급을 무기로 같은 달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고, 국제 로밍 서비스를 실시했으며, 7월에는 ‘011 디지털 이동전화 고객 10만명 돌파’의 실적을 일궜다.
이듬해 1월 ‘무궁화 위성’을 이용한 무선 호출 서비스를 시작한 뒤 한국이동통신은 그 해 3월 SK텔레콤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최 회장은 격려사를 통해 제2의 창업 정신을 독려했고, 에너지와 함께 SK그룹 성장의 또 다른 축인 통신 사업의 큰 날개를 펼쳤다.
<류정일 기자> /ryus@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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