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화사한 봄 햇살, 꽃들이 흐드러진 자리에 여인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허리춤에까지 올라오는 벙그러진 환한 꽃과 햇살에 눈이 부실 법도 한데 정면을 응시한 여인의 눈은 흔들림이 없고 표정은 담담하다. 뒤쪽에 꽃담 한 조각이 보이고, 나무가 우거진 그늘은 깊고 어둡다.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 서 있는 바로 옆 바위에 새겨진 ‘읊을 영(詠)’ 글자 한 자가 보인다.

이 환한 대낮의 사진 속 주인공은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의 부인 광산 김씨다.

여인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어느 때쯤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인은 대한제국의 영욕을 함께 겪어냈을 터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에서 4일부터 ‘운현궁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고종과 의친왕, 의친왕의 아들 이우 가족,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등 개인이 소장한 귀한 사진들로, 110년의 세월을 건너 황실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운현궁은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격동의 한국 근대사 정치의 근거지다. 힘 있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한 이하응의 꿈과 비전이 담긴 곳이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한창 세도를 떨칠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에 달하고, 웅장한 4대문이 있어 궁궐에 비견됐을 정도였다.

운현궁이 일반인에게 만만하게 다가온 것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을 통해서다. 1930년대 김동인은 이하응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 유명한 ‘상갓집 개’꼴을 입혔다. 고관대작들 틈에서 술을 얻어먹으며 안줏거리를 개처럼 받아먹는 이하응의 천덕꾸러기 이미지는 이렇게 굳어졌다.

태풍 ‘볼라벤’과 ‘덴빈’이 휩쓸고 간 자리가 황량한데 가을은 오고 있다. 운현궁의 뜰에서 만나는 가을은 어떤 빛깔일지.

이윤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