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회> 사랑을 위한 의식 (5)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강유리 선수로부터 제의에 응하겠다는 답전을 받은 권도일은 크리스탈 술잔에 호박색 양주를 가득 따랐다. 자축하는 의미를 담은 술자리였다. 물론 그 맞은편에는 영원한 후원자인 재벌2세가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샨드리에 조명이 화려한 곳이라서인지 지그시 감은 눈꺼풀 주위로 벌건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리로 과거의 기억이 영사막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언제였던가…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 선 난간에 걸터앉아 ‘유민회장을 때려잡자’고 외치던 아버지 권일주의 모습부터 떠올랐다.
“유민 회장이 제 아버님의 인생을 망쳐놓은 장본인이지요. 잘못은 유민 회장이 저질러 놓고 죄 값은 제 아버님이 받았으니까요.”
“유민 회장 대신 부친께서 수감되셨군요. 그 기간이 길었나요?”
“마흔 살부터 무려 7년이나 갇혀 살았습니다. 제가 열세 살 때 들어가셔서 스무 살 되던 해에 풀려나셨지요.”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의 청춘을 모두 날린 셈이군요.”
“세상살이는 참으로 묘하게 얽히더군요. 그렇게 날린 청춘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요즘엔 유민 회장의 외동딸이 제 아버님의 휠체어를 밀고 있으니까요.”
“맞아요, 권 전무님 부친께서 홀로는 거동을 못하시지요? 그런데 유민 회장의 외동딸이 부친의 간병을 맡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래서 고민 중입니다. 간병만 해준다면야 그리 큰 고민이 되질 않겠지만… 작정하고 저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니 문제입니다. 나이 차도 심하고, 무엇보다도 집안끼리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니까요.”
“아하!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 와중에 유민 회장의 아들까지 섭외해달라고 했으니 내가 너무 지나친 부탁을 드린 꼴이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어디까지나 회사 업무로 인한 섭외인데 제가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세상살이는 참으로 묘하게 얽혀있습니다. 내가 유민 회장의 아들을 원하는 까닭은… 나 역시 내 아버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이지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부친이신 왕회장 님의 친구 분께서 랠리경기 도중에 변을 당하셨다고요? 불에 탄 1974년산 치타가 그 흔적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도 유리관에 모셔진 채로 전시되어 있는 1974년산 치타! 아버님께서는 불에 그을려진 그 차를 볼 때마다 죽은 친구를 떠올리곤 하시지요. 결국 누군가가 그 차를 몰고 랠리경기에서 우승을 해야만 아버님의 한이 풀리실 겁니다.”
둘은 이렇게 말한 뒤에 조용히 잔을 부딪쳤다. 소리 없는 건배, 하지만 앞날을 기약하는 굳은 약속의 건배였다.
아무리 자축의 술이라고 한들 독하지 않으랴. 무려 40도에 달하는 독주를 연거푸 석 잔이나 들이키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질수록 머릿속 영사막으로는 과거의 영상이 점점 짙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휠체어에 유민 회장의 얼굴사진을 붙여놓고 복수를 꿈꾸는 아버지 권일주,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 다섯 시간 이상이나 휠체어를 밀어주는 유한솜, 지난 몬테카를로 랠리경기에서 계획대로 랠리 카 뒷부분을 들이받아 벼랑 아래로 밀어버렸다면… 지금쯤 불귀의 객이 되어있을 유호성…
그들의 모습은 서로 범벅이 된 채로 머릿속 영사막에 흐르고 있었다. 곧 성사될 5개국 관통 랠리경기에서도 이들의 원과 한은 어떤 식으로든 얽히거나 녹아들 것이 뻔했다. 결국엔 유민 회장이 목숨을 내놓거나, 그의 아들 유호성이 목숨을 내놓아야만 풀릴 만큼 단단히 맺힌 매듭이기 때문이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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