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포용적, 안정적, 책임 있는 평화공존 구상과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당사자 간 논의가 제안됐다. 한반도 평화를 핵 없는 세계의 이정표로 삼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를 멈출 방안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 좋은 관계라며 한미연합훈련의 축소를 지시하고 북미 대화 재개 의사를 드러냈다. 그동안 단절됐던 남북·북미 관계에서 평화와 핵문제를 다룰 가능성이 다시 나타난 셈이다.

다만 평화의 움직임이 곧 비핵화 진전으로 이어질지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화가 핵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건을 분석한 연구는 먼저 해당 국가가 누구의 위협 때문에 핵무기를 필요로 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특정 상대국의 위협이 핵무기 필요의 주요 원천이라면, 그 상대국과의 평화가 핵정책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커진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는 한국만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북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력과 함께 ‘대북 적대정책’에 대한 위협 인식이 핵무기 필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남북관계 개선만으로는 북한의 핵무기 필요가 충분히 감소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북 간 긴장 완화와 함께 북미 적대관계의 완화와 체제 안전 논의가 병행되어야 한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는 평화가 핵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평화의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일시적 대화나 군사적 긴장 완화는 충돌 위험을 낮출 수 있지만, 북한이 핵무기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할 만큼 안보환경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오히려 관계가 다시 악화될 가능성에 대비해 핵무기를 보험으로 남겨두려 할 수 있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평화에서는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시험의 중단, 핵물질 생산의 동결과 같은 제한적 자제는 가능하더라도, 이를 넘어 핵무기와 관련 능력의 완전한 포기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반면 전쟁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배제되고 관계 정상화와 안전보장이 제도화되는 높은 수준의 평화에 이르면, 핵무기의 필요성과 보험가치가 낮아져 핵무기와 관련 능력을 실질적으로 축소하거나 포기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비핵화를 협상의 전제나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지금과 같은 심각한 적대와 핵무장 상태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달성 가능한 평화 수준과 그에 상응하는 핵문제 해결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남북 간에는 우발적 충돌 방지와 긴장 완화를 추진하고, 북미 간에는 핵·미사일 시험과 핵물질 생산 제한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이는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거나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낮은 단계의 핵활동 제한은 종착점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화와 북핵 문제 가운데 어느 하나의 선결만을 요구하는 접근을 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과 북미 접촉을 함께 복원하고, 각 대화에서 도달할 수 있는 평화와 핵문제의 단계별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과 북핵 문제 해결은 단번에 얻는 결과가 아니라, 적대와 핵위험을 함께 낮추며 단계적으로 이룰 과제다.

김광진 한국안보전략·시스템학회장 전 공군대학 총장


shind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