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규현 쿠첸 밥솥개발팀장 “가전제품 중 가장 어려운 게 밥솥”
IMF 때 “6개월만 있다 서울 가자”며 시작…첫 제품 매장 진열된 순간 진로 바뀌어
“물·열·압력에 입맛, 심지어 사람 기분까지 맞춰야 하는 제품”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자동차를 만들어보겠다고 기계설계학과에 갔는데 밥솥을 26년째 만들고 있습니다.”
염규현 쿠첸 밥솥개발팀장이 자신의 이력을 설명하며 웃었다.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던 기계공학도가 20년 넘게 붙들게 된 것은 밥솥이었다.
시작부터 계획한 길은 아니었다. 염 팀장이 취업시장에 나온 때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이었다.
“IMF라 사람도 안 뽑고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교수님 추천으로 밥솥을 만드는 회사에 왔어요. ‘6개월만 일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자’ 하고 내려왔는데 26년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교수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생각이 바뀐 것은 자신이 개발에 참여한 첫 제품이 세상에 나온 뒤였다.
“제가 첫 제품을 만들어 삼성전자 로고를 달고 삼성리빙프라자에 진열된 걸 처음 봤어요. 엄청난 희열이 있었습니다. 내가 컴퓨터 안에서 설계한, 세상에 없던 제품이 실제 매장에 전시돼 있는 거잖아요. 그때부터 ‘그래도 잘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전 직장에서 밥솥을 중심으로 비데, 공기청정기, 가습기 등을 개발했던 그는 쿠첸으로 옮긴 뒤에는 11년째 밥솥에 집중하고 있다.
26년을 해도 밥솥이 어렵냐고 묻자 대답은 오히려 단호했다.
“제가 볼 때 이렇게 많은 역학을 쓰는 제품은 밥솥밖에 없습니다.”
기계설계를 전공한 그가 하나씩 손가락을 꼽았다. 뚜껑과 손잡이가 움직이는 데는 동역학이 필요하고, 물과 증기가 움직이면 유체역학이 개입한다. 열을 다뤄야 하고 압력을 견뎌야 한다. 재료의 성질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염 팀장이 꼽은 밥솥의 진짜 어려움은 기계공학 밖에 있었다. ‘사람의 입맛’이다.
그는 예전 직장에서 받은 한 소비자 상담 사례를 꺼냈다. “어제는 밥이 맛있었는데 오늘은 맛이 없다는 전화가 온 적이 있어요. 취사 과정도 똑같고 밥이 설익은 것도 아닌데 오늘은 맛이 없다는 겁니다. 부부싸움을 하셨는지, 애가 사고를 쳤는지 저희가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염 팀장은 이 이야기를 하다가 웃었지만 결론은 진지했다. “정수기는 물이 제대로 정량 나오고 따뜻한 물, 찬물이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밥솥은 맛을 느끼잖아요. 소비자의 기분까지 맞춰줘야 하는 제품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가전제품 중 제일 어려운 제품이 밥솥이라고 항상 얘기합니다.”
같은 ‘맛있는 밥’의 정의도 계속 바뀐다. 과거 압력밥솥은 찰지고 부드러운 밥을 구현하는 데 기술을 집중했다. 최근에는 밥알이 낱알로 살아 있는 식감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게 염 팀장의 판단이다. 그 변화는 집에서도 느꼈다.
“아들 둘이 기숙사 생활을 많이 하는데 집에 오면 저한테 ‘햇반처럼 만들어주면 안 되냐’고 해요. 밖에서 그런 밥을 많이 먹으니 그런 식감에 익숙해진 겁니다. 그걸 보면서 밥맛의 트렌드도 바뀌고 있구나 생각했죠.”
쿠첸이 새로 개발한 ‘탱글백미’도 이 고민에서 출발했다. 밥알의 형태와 탄력을 살리는 방향으로 불림 시간과 온도, 압력, 가열량을 다시 설계했다.
염 팀장은 최근 개발한 티타늄 내솥을 테이블 위에 들어 보이며 한참을 설명했다. 단단한 티타늄을 밥솥 내솥 형태로 성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내솥 안쪽에는 대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한 ‘마이크로 그리드 텍스처링’도 넣었다.
“처음부터 성공하는 연구개발은 없습니다. 소재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시행착오가 있었고, 텍스처를 만드는 데도 실패했고, 이 형상을 만드는 데도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티타늄 내솥 개발에만 약 2년이 걸렸다. 담당 개발자는 장기간 이 작업에 매달렸고 염 팀장 역시 양산 단계에서 약 6개월간 집중했다고 했다.
그가 밥솥을 이야기할 때 여러 차례 나온 단어는 ‘자부심’이었다. 자신이 만든 제품이 매장에 놓이고, 방송에 등장하고, 소비자가 실제 사용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26년째 밥솥을 만들고 있지만 만들고 싶은 밥솥도 아직 남아 있다. “소비자가 취사 버튼을 한 번만 누르든, 휴대전화에서 누르든, 나중에는 그냥 머리로 ‘취사하고 싶다’고 생각하든 밥솥이 스스로 알아서 밥을 지었으면 합니다. 소비자가 어떤 걸 넣든 ‘내가 다 알아, 너는 그냥 취사만 생각해’라고 할 수 있는 밥솥이 최종 목표”라고 염 팀장은 말했다.
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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