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놀이보다 공놀이가 좋았던 소녀
훈련병의 롤모델 ‘대체불가 부사관’에
선수시절 상무 지명으로 반강제 입대
축구화 대신 군화 신어 “불만 많았죠”
훈련 시절 부사관의 솔선수범에 매료
재도전 끝에 장기복무심사 관문 통과
소아암 환자 위해 머리카락 기부·헌혈
이제 제3의 인생 ‘자선사업가’ 설계중
인형놀이보다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공놀이하는 게 즐거운 소녀였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축구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축구 유니폼을 입고 국제무대에 나설 만큼 기량도 인정받았다. 이제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육군 6사단 19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군기강부사관 임무를 수행중인 윤지수 상사의 얘기다.
윤 상사의 스토리에 주목하게 된 것은 축구선수 출신 군인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윤 상사는 뜻하지 않은 계기로 군문에 들어섰지만 ‘대체불가 부사관’으로 선발될 만큼 ‘참 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60여회의 헌혈과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머리카락 기부 등 꾸준한 나눔도 실천하고 있다. 윤 상사의 얘기를 들어본다.
▶ ‘슈팅 라이크 베컴’...꿈이 이루어지다=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자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2002 한일 월드컵 열기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던 때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느 날처럼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던 중이었는데 지켜보시던 우리 학교 남자축구부 감독님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남자축구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여자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때부터 정식으로 협회에 등록돼 축구선수로 뛰게 됐습니다”
마치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의 여주인공처럼, 좋아하는 놀이로 시작했던 동네 축구였는데 정식 선수까지 됐으니 행복하기만 했다. 고비는 예상치 않게 찾아왔다. 대학 선수생활을 마치자 WK리그 부산상무로부터 덜컥 지명을 받았다. 지금은 선수선발세칙이 바뀌어 여군 부사관으로 자원입대할 선수들만 입단하지만 당시에는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군에 입대해 부사관으로 임관해야했다. 지명 받은 팀으로 가지 않을 경우 3년 간 다른 팀과 계약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 상사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 모두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축구만 해온 제가 군사훈련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니 입대 직후에는 모든 일에 부정적이었습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던 중 또 한번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윤 상사와 동료들을 지도하고 챙겨주던 훈련부사관 교관들의 솔선수범하는 모습과 군인으로서의 마인드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훈련부사관 교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내 나라, 내 가족을 내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군인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윤 상사는 자유계약(FA) 자격을 얻었을 때도 다른 팀 이적이 아닌 상무와의 계약 연장을 선택했다. 이후 사이드 미드필더로 뛰며 2012년 독일에서 열린 제8회 세계군인스포츠위원회(CISM) 여자축구대회 참가를 비롯해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2014년 정규리그를 끝으로 축구선수로서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2014년 리그 수원시설관리공단과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제가 첫 득점을 올려 이기고 있었는데 게임이 끝나기 바로 직전 실점해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컨디션과 플레이가 정말 좋았기 때문에 아쉬움도 컸습니다”
하지만 축구와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도 지역단체 체육활동과 행사에 초청받으면 다시 축구화 끈을 조이곤 한다.
▶축구화 벗고 군화로...한 차례 고배 불구 장기복무 재도전=선수로서 축구장을 떠난 윤 상사의 선택은 전역이 아닌 장기복무였다. 하지만 2015년 첫 번째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장기복무 심사 관문 자체가 녹록치 않은데다 5년차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축구에 주력하다보니 군인으로서의 역량은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다. “누가 봐도 멋진 참 군인이 되자라는 목표를 갖고 야전으로 나섰지만 당시 장기복무 선발이 많지 않았고, 많은 선배들이 탈락하는 모습도 지켜봤기 때문에 한번에 선발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윤 상사는 1년 간 자기계발에 매진했고 이듬해 재도전에서 장기복무 선발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한다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게 제 좌우명입니다. 큰 목표 달성을 위해 작은 목표를 하나하나 이루어가다보니 간절히 원하던 장기복무에서 선발될 수 있었습니다” 1년에 국가공인자격증 1개 취득, 한달에 책 3권 정독, 봉사활동 지속 등이 그녀의 결코 작지 않은 ‘작은 목표’였다.
윤 상사는 6사단 19연대 신병교육대대 교관으로 본격적인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응급처치교관 과정, 자살예방교관 양성 교육 등 군 교육과정을 통해 교관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꾸준히 함양시켰다. 그리고 2018년, 예전 축구선수로 갓 입대했을 때 좌절과 실망을 기대와 희망으로 바꿔준 선배들과 같은 훈련부사관 휘장을 달게 됐다.
이후 신병교육대대에서 자상하면서도 통솔력 강한 교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교관은 모든 면에서 ‘저 사람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롤 모델’이 돼야합니다. 제가 항상 가슴속에 품고 사는 말이 ‘내가 꿈을 이루면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된다’인데, 교관들은 본받고 싶은 멋진 사람이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먼저 실천하고, 철저한 군 기본자세와 군인정신을 보여준다면 신병들도 따라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윤 상사는 입대 초반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훈련병들이 정성어린 훈육을 거쳐 성장할 때가 가장 뿌듯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교육기간 중 많이 힘들어하던 ‘전우’들이 신병교육을 마치고 자대로 떠날 때 눈물을 흘리면서 ‘소대장님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주고간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진심어린 훈육이 헛되지 않았구나라고 느끼며 정말 큰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녀가 아끼던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는...아동 꿈 키우는 자선사업가, 인생 3막 목표=윤 상사의 진정성은 육군 내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녀는 2018년 장병인생비전설계 실천 우수사례로 선정된 데 이어 2020년에는 훈련병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대체불가 부사관’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체불가 부사관은 ‘대다수 체험하지 못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부사관’이란 의미로 육군 최고 베테랑 부사관에게만 주어지는 타이틀이다.
윤 상사의 시선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봉사와 나눔은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다. 이미 60여 차례 이상 헌혈을 해오며 대한적십자사로부터 헌혈유공장 금장을 받았다. 특히 올해 1월 1일에는 새해를 뜻 깊게 시작하자는 생각에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아암 환자들이 항암치료 과정에서 대개 가발을 쓰는데 항균처리 인모 가발이 고가여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머리카락 기부가 도움이 된다는 언론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도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카락을 길러왔습니다. 가발 제작을 위한 머리카락 길이가 25㎝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에 길게 길렀다가 갑자기 잘라 관리가 조금 번거로워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암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정도 불편쯤이라며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윤 상사는 축구선수와 군인에 이어 자선사업가를 제3의 인생으로 설계중이다. “누가 봐도 멋진 참 군인으로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뒤에는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가가 되는 게 목표 중 하나입니다. 한창 꿈을 키워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꿈조차 꾸지 못하는 현실에 갇혀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데 이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자선단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아이들이 커서 또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지원하고 싶습니다.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눔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신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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