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베이스 잡은지 2년 만에 두각
세계 유수 콩쿠르 석권한 ‘영재’ 아티스트
조연에서 주연의 자리로…늘 도전과 모험
“멋진 현악기 알리는 소리꾼…천천히 빛을 발했으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등장이 ‘파란’이었다. 사실 자기 몸보다 큰 악기를 몸에 안던 날의 기억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당연히 “운동선수가 되리라 생각”했던 키 작은 소년에게 더블베이스라는 악기는 커다란 크기만큼의 무게로 다가왔다. “반에서 세 번째로 작았는데, 드는 것도 일인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갔어요. (웃음) 활도 너무 무겁더라고요.” 악기를 시작하자, 영재는 잠을 깼다. “더블베이스의 매력이요?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해요. 한 음 한 음의 존재감이 있어, 한 번만 그어도 마음을 움직이는 깊은 울림이 있어요.” 내내 비인기 악기라 존재감이 없던 더블베이스는 성민제(31)의 등장과 함께 주연의 자리로 서서히 걸어나왔다. 첼리스트 송영훈과 ‘나이트클럽 2021’(15일·잠실 롯데콘서트홀)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한창인 성민제를 만나 더블베이스와 함께 해온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 유수 콩쿠르 석권한…영재의 등장=더블베이스가 무대의 한가운데에 서는 일은 드물다. 오케스트라의 맨 뒷줄에 자리했던 악기는 성민제와 함께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그의 길은 많은 순간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도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악기의 특성상 도전을 해야만 하는 포지션이에요. 더블베이스는 솔로 연주를 위한 곡이 많지 않고, 재주로 유명한 악기거든요. 오케스트라에서 백업사운드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요.”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그는 더블베이스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활을 잡았다. “20년 전이었어요. 어린이에게 맞는 작은 악기가 없어 성인 악기를 썼어요.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좋은 악기와 활을 지원받았어요. 어릴 땐 장비발이 있었던 거 같아요.(웃음)” 초등학생이 다루기엔 힘든 악기였다. 주법을 잡는 것도 불가능했다. 반짝이는 재능은 기침처럼 숨길 수도 없었다. 더블베이스를 잡고 불과 2년. 실력은 송곳처럼 비집고 나왔다.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다. 특별히 의지할 곳은 없었다. “저의 선생님은 저였어요. 스스로 배워야 했고, 스스로 고쳐야 했어요. 혼자 악기를 잡다 보니 나쁜 습관이 생겼고, 그 습관들을 고치려 독학하면서 제 주법을 찾았어요.”
더블베이스를 시작하고 선화예중을 졸업한 성민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로 입학했다. 성민제가 더 주목받은 것은 순수 국내 교육으로도 세계 무대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일찌감치 금호문화재단의 영재콘서트를 통해 음악영재로 발굴돼 해마다 독주회를 가졌고 국내 유수 콩쿠르를 석권했다.
“중학교 땐 제가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웃음) 그땐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잖아요. 더블베이스 CD를 300장 정도 들었는데, 제가 제일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해외 콩쿠르에 나가고 달라졌죠. 정말 잘하는 사람이 많구나, 내가 제일 잘하는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죠.(웃음)”
전 세계 더블베이시스트들이 모인 세계 유수 콩쿠르를 휩쓴 것은 성민제였다. 2006년 열여섯 살에 세계 권위의 요한 마티아스 스페르거 더블베이스 국제 콩쿠르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쿠세비츠키 더블베이스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했다. 그의 이름 옆엔 ‘영재’, ‘천재’라는 수사가 따라다녔다. 시기마다 고비는 있었다. “슬럼프가 주기적으로 왔어요. 특히 콩쿠르를 준비할 때 스트레스가 컸죠. 자존심도 상하고, 강박도 오고요. 목표에 따른 슬럼프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은 연주자를 향한 불편한 시선도 때때로 와 닿았다. “어릴 땐 천재였는데 나이가 드니 안되는구나, 그런 시선도 느껴졌어요. 그럴 때마다 흔들리지 않아야 했어요. 흔들리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요.”
▶ “더블베이스를 알리는 소리꾼…천천히 갈 것”=클래식의 울타리 안에서 영재로 주목받았음에도 그는 “클래식은 늘 어려웠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땐 연주자로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마주했다. “그땐 제 자신이 50대 후반처럼 느껴졌어요. 삶에 지쳐 있었죠. 지쳤던 이유는 마이너 악기를 하는 연주자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연주가 잘 안 되다 보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지친 마음에 갈증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다 어떤 것을 이뤄냈을 땐 즐거웠고요. 이런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그는 음악인생의 변곡점을 2016년 즈음으로 꼽았다. “클래식만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양한 장르를 접하고, 공백의 악보를 보자 신세계가 열리더라고요. 그걸 채울 생각이 기대되는 악보를 봤을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그 때 재즈를 깊이 접했다. “오히려 클래식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졌고, 콘트라베이스가 쉬워질 수 있다는 것, 음악이 재밌다는 걸 느꼈어요. 이전까진 클래식을 연주하는 기술자였는데 아티스트는 이런 거라는 걸 알게 된 때였어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새로움을 향한 갈망은 그를 지탱해준 힘이었다.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며 누구나 가는 길을 갈 수 있었지만, 그는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지금의 성민제는 캐릭터가 많다. 영재로 불렸던 시간을 지나, 보다 많은 얼굴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솔로 연주자로 더블베이스를 주연의 자리에 뒀고, 더블베이스가 더 많은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획사를 세워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는 등 더 많은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여러 음악적 길이 있었지만, 늘 그때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린시절엔 에피타이저 대신 메인 요리를 먼저 먹었어요. 그러다 다시 배가 고파졌고요. 이젠 천천히 한 단계씩 밟아가며 세트 메뉴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순서대로 천천히 메인까지 가서 빛을 발하면 좋겠어요.”
클래식 계에서 성민제의 길은 ‘튀는 행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도와도 다르다. 단지 더블베이스가 악기로서 인지도를 쌓고,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제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보는 시선도 있어요. 더블베이스를 오케스트라의 악기로서 존중하듯이 이러한 행보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저는 스스로를 콘트라베이시스트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전 소리꾼이에요. 이 악기도 메이저 악기라는 것, 이런 멋진 현악기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에요.”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만남…“피아졸라 김장 한 무대”=아르헨티나의 탱고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리는 ‘나이트클럽 2021’도 그의 음악적 방향이 묻어난 무대다. 성민제는 이 무대를 위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첼리스트 송영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2010년 ‘정명훈과 7인의 음악인들’ 무대에서 만나 슈베르트의 ‘송어’를 듣고 팬이 됐다고 한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을 저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슷한 저음 악기를 하고 있다는 동지애도 있고요.”
일찌감치 ‘피아졸라 전도사’로 불린 송영훈과 성민제가 함께 하는 이번 공연에선 피아졸라를 완전히 바꿨다. 가장 낮은 음의 두 악기인 더블베이스와 첼로가 만났고, 고음 악기는 나오지 않는다. 무려 “150여 곡의 악보를 구해 연주곡을 골랐고”, “누에보 탱고를 요즘 트렌드에 맞게 다시 한 번 누에보로 재해석”했다. 편곡은 콘트라베이시스트 최진배가 맡았다.
“기존의 스타일을 살짝 변형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리듬을 완전히 바꿨어요. 한국적이면서도 심플한 방향으로 잡아 실험적이고, 독창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것을 잃지 않도록 했어요.”
무대 위에서 들릴 12곡은 각각의 곡마다 조명과 무대 연출을 달리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대를 연출한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주인공이 돼 오페라의 남녀 주인공처럼 무대를 채워요. 피아졸라 만을 보여주는 무대인 만큼, 피아졸라 김장을 한 느낌이에요. 한 곡 한 곡 다 아는 곡이지만, 모두가 새롭게 느껴질 거예요. 푹 익어 맛있는 음식이 나올 것 같아요. ”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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