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O국제지휘콩쿠르 가보니…
주어진 시간은 20분. 말끔한 차림의 청년 지휘자가 무대로 걸어 들어오자, 커다란 화면 한쪽에선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와 인사를 나눈 지휘자는 일곱 명의 심사위원을 마주보며 우승자를 가리는 무대로 향해갔다. 지난 12일 오전 열린 2차 본선. 첫 곡은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 김택수의 ‘더부산조’였다. 본선에 오른 7명의 지휘자들은 한국 전통음악 산조를 서양악기로 표현한 이 곡을 일곱 가지 색깔로 해석했다.
오케스트라와 소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지휘자들은 8분 길이의 곡을 한 번 연주한 뒤 나머지 시간동안 한 마디 한 마디 확인하며 해답을 찾아갔다. 연습과정까지 고스란히 심사의 일부가 된 것은 다른 콩쿠르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현악기는 피치카토(현을 튕기는 주법)을 조금 더 날카롭고 강하게 해볼까요?” (윤한결) “한국 전통악기의 해금 소리가 나도록 비브라토를 많이 해주세요. 중요한 건 떨림이거든요.” (김여진)
미국 출신의 엘리아스 피터 브라운은 곡의 마디마다 설명을 더하고, 입으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진양조는 정말 중요한 대목이에요.”, “스타카토를 표현할게요. 얍얍얍얍. 관악기는 팍.”(엘리아스 피터 브라운) 콩쿠르 이후 만난 브라운은 “‘더부산조’를 공부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며 “기존과 다른 장단, 소리북, 장구의 악보를 공부하고 해석하고, 이것이 오케스트라에서 어떻게 들리는지 이해해야 했다. 그래서 이 부분들이 만나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KSO)의 제1회 KSO국제지휘콩쿠르. 전 세계 42개국에서 166명이 참가했고, 이들 중 본선에 진출한 6개국 12명은 5일간의 일정(11월 10~14일)을 소화하며 관객과 심사위원 앞에 섰다.
제1회 KSO국제지휘콩쿠르에서 2위에 오른 한국 출신 윤한결.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본선 진출자들이 받아든 과제곡은 일종의 ‘복불복’이었다. 참가자들은 총 8곡 중 제비뽑기를 통해 본선 1, 2차와 결선 과제곡을 정했다. 과제곡 리스트는 참가자 모두에게 낯설었다. 정치용 심사위원장은 “낭만성과 표현성 위주의 대편성 관현악곡을 선정, 참가자들이 자신의 음악적 소양과 테크닉을 마음껏 펼쳐보일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박선희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 대표도 “콩쿠르마다 자주 나오는 곡들을 집중적으로 외워 참가하는 경우 제대로 된 실력을 보기가 힘들다”며 “참가자들의 음악성을 보다 면밀히 살피기 위해 기존 콩쿠르에서는 나오지 않는 관현악곡을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은 “주최 측이 의도했겠지만, 준비해야 하는 과제곡들이 모두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 곡이었다”며 “매곡마다 충분히 씹어먹고 소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고 말했다. 중국 출신의 리한 수이 역시 “무척 새로운 곡이었던 만큼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이 됐다”고 했다. 윤한결은 “이렇게 낭만적인 작품을 연속으로 한 적은 처음이라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콩쿠르엔 세계적인 심사위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지낸 정치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비롯해 크리스티안 에발트(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교수), 플로리안 리임(국제음악콩쿠르 세계연맹 사무총장), 프랭크 후앙(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 피터 스타크(런던 왕립 음악원 및 베이징 중앙 음악원 교수), 레이첼 보론(문화예술경영인), 스티븐 슬론(베를린 예술대학교 교수) 등이다. 지휘자 출신, 악장 출신, 예술경영인 출신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공정한 기준으로 파이널리스트를 가렸다.
정치용 심사위원장은 “좋은 지휘자란 풍부한 음악적 소양과 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연주자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다. 이를 중점으로 심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어진 과제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하게 준비했는지,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주자들과 얼마나 긴밀한 소통을 나누는지, 얼마나 몰입감있는 무대를 선보이는지 등 지휘자로서 갖춰야하는 기본 소양을 다방면으로 살펴봤다”고 했다.
결선 무대에서 드뷔시의 ‘바다’를 연주한 엘리아스 피터 브라운이 제1회 KSO국제지휘콩쿠르의 우승자로 뽑혔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결선 이후 우승자를 정하는 과정엔 치열한 각론이 이어져, 발표 시간이 늦어지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올해 개최된 국제지휘콩쿠르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모였다고 입을 모았다. 정 심사위원장은 “세 참가자 모두 각기 다른 개성과 음악성을 가지고 있어 순위를 매기는 것이 어려웠다”며 “우승자는 지휘 테크닉은 물론 음악성과 소통 능력이 어우러져 매 라운드마다 매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레이첼 보론 심사위원은 “지휘자의 가장 큰 목표는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일“이라며 “이를 위해 지휘 기술, 음악성, 모든 장르와 작품에 대한 지식,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능력을 보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초대 우승은 결선 무대에서 드뷔시의 ‘바다’를 연주한 엘리아스 피터 브라운에게 돌아갔다. 브라운은 “결선 동안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 자신을 믿고 밀고 나가는 싸움이었다”며 “지난 2년간 트램폴린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젊은 음악가로 거칠게 활동해왔는데, 이제 커다란 시작을 할 수 있는 계단을 건너 뛴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콩쿠르에서 오케스트라가 뽑은 지휘자상도 가져갔다. 브라운은 “지휘자의 역할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귀를 열고 활발하게 들을 수 있도록 돕고, 오케스트라가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무대를 함께 한 동료들이 준 상이 우승 못지 않게 값지다”고 말했다. 2위에는 한국 출신의 윤한결이 올랐다. 그는 오프라인 결선 현장과 온라인 생중계에 참여한 관객들이 직접 뽑은 관객상도 받았다. 3위에는 리한 수이가 올랐다. 수상자들에게는 총 상금 8000만원이 수여되고, 우승자에게는 상금 5000만원이 주어진다. 부상으로 수상자를 대상으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부지휘자를 선발하며, 국내 유수 오케스트라와의 다양한 연주 기회가 주어진다.
국제지휘콩쿠르는 더러 있지만, 아시아에선 일본과 홍콩이 유일했다. 이번 콩쿠르는 2005년 열린 제1회 수원국제지휘콩쿠르 이후 무려 16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국제지휘콩쿠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콩쿠르의 명분과 의미가 크다. ‘지속가능한 음악’ 생태계 구축을 위해 젊은 지휘자를 발굴·육성하고, K-클래식의 외연 확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번 콩쿠르의 첫 걸음이 값지다. 정 심사위원장은 “세계가 주목하는 K-클래식 중 지휘 분야의 다음 세대를 잇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것이 유의미하다”며 “특히 이번 콩쿠르에서 한국 작곡가의 곡이 과제곡으로 선정됐는데 세계의 젊은 지휘자들에게 우리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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