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의 길 걸어온 정통 미술학도에서
오브제를 통한 공간 디자이너로 전향
무대미술 본고장 체코로 무작정 유학
손이 가진 리얼리즘에 기죽었던 경험
영감에 이끌려 비주류의 세계 발디뎌
제게 딱 맞는 ‘예술적 언어’ 찾은 거죠
체코에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인형을 만드는 일’. 하지만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다. ‘영감을 주는 사람(Inscenator)’이다. 10m가 넘는 거인부터 6㎝밖에 되지 않는 작은 인형까지, 평범한 하루에 낯선 존재를 툭 떨어뜨리곤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사라진다.
“어김없이 시작한 아침에 맞은편에서 나무로 만든 사람이 걸어오는 상상을 할 때가 있어요. 이런 날은 굉장히 센세이션한 날이잖아요. 파리 한복판에 걸리버가 나타나면 그곳은 소인국으로 변하고, 숲속 낙엽 밑에 숨겨진 작은 인형을 발견한 난 거인이 되는 거죠.(웃음)” 그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일탈이고, 선물이다. “전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에요. 누군가의 하루에 약간의 영향을 주는 것. 제가 오브제들을 통해 만들어가는 세상이에요.”
문수호 작가의 일은 한국에선 다소 낯설다. 아직은 대중적이지 않아서다.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처럼 마리오네트(Marionette, 실로 묶어 조정하는 인형, 혹은 퍼펫(Puppet·인형)이라고도 부름)를 만들고, 그것이 주인공이 된 공연을 올린다. 현재 극단 목성의 대표이기도 하다. 최근 작업한 마포 M 국악축제 ‘꼬레아 리듬터치’의 일환으로 선보이는 마리오네트 음악극 ‘마포 삼해주(三亥酒) 이야기’(9일 유튜브 공개)도 그 중 하나다. 오는 7일부턴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그간 작업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12월 12일까지·문수호전)를 연다. 최근 마포문화재단에서 만난 문 작가는 스스로를 “오브제를 통해 변화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문 작가가 걸어온 길은 그리 평범치 않다. 남들과 같은 시작을 했지만, 지금의 자리는 전혀 다르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나와 동양인 최초로 체코국립공연예술대학(DAMU)에서 대안연극, 인형극을 전공했다. 정통 미술학도의 길을 걸은 무대 디자이너이자, 스스로 ‘비주류의 길’을 선택해 국내 최고의 ‘오브제 아티스트’가 됐다.
서양화를 전공하다 무대미술로 확장했고, 그러면서 다양한 인형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체코 유학을 생각한 것이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다. “인형을 만들고 보니 가지고 노는 방법을 몰라” 본토로 향했다. “무대미술을 잘하는 나라”, “마리오네트의 본고장”으로다. 무턱대고 떠났으나 패기는 있었다. “체코어도 모르면서 원어민 과정에 지원”해 합격한 최초의 동양인이다.
체코에서의 유학 생활과 현지에서 일해온 모든 시간은 작가 문수호의 작업관을 흔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체코에선 인형을 디테일하게 만들지 않아요. 사람처럼 생긴 인형이 사람처럼 움직이는 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잖아요. 그 반대여야 놀라게 되는 거죠. 그곳에서 공부하며 제 손이 가진 리얼리즘이 콤플렉스가 됐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계속 그려 리얼리즘을 버리지 못했는데, 그게 너무 진부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볼 때 체코 친구들은 괴발개발 그리는데 엄청 재밌는 거예요.”
콤플렉스를 넘기 위해 안 해본 게 없다고 한다. 왼손으로도 그렸고, 눈을 감고 그렸다. “별짓 다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왼손으로 일주일 그렸더니, 그 친구들보다 잘 그리는 거예요. 제가 그곳에서 기껏 들은 칭찬은 ‘잘 만들었네’, 거기까지였어요.” ‘리얼리즘’을 벗고, 도리어 “형이상학적 인형”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나서야 손이 가진 콤플렉스를 덜어낼 수 있었다.
문 작가의 마리오네트에는 저마다의 캐릭터가 반영돼 태어난다. 문 작가는 마리오네트가 태어나는 과정은 “무한한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고, ‘창작의 고통’에 부딪힌 “‘궁여지책’이기도 하다”며 웃었다.
마리오네트를 만드는 첫 단계는 영감을 찾는 일이다. 특정 인물의 형상을 만들기 위한 작업의 시작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모티프를 얻는다”고 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그려봐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땐 거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영감이 된다. “아스팔트에 새겨진 빛바랜 얼룩이나 건물의 페인트가 벗겨진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독특한 모양이 나와요.” 여기에 상상력을 가미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것도 그의 방식이다. 보통 마리오네트의 제작부터 극작, 음악, 연출, 미술, 연기까지 문 연출가가 도맡는다.
마리오네트의 재료를 다듬는 과정에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는 마리오네트를 만들 때 스케치의 과정은 대체로 생략한다. “스케치를 하면 너무 뻔한 사람이 나오기 때문”이다.
“억지스럽게 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이미 나무 스스로, 자기가 만들어둔 것이 있어요. 큰 나무 조각을 도끼로 찍고 쪼개다 보면 떨어진 조각이 희한하게 깎여 있을 때가 있어요. 그것 자체를 존중하면서 얼굴이 보일 때까지 다듬다 보면 하나의 인형이 만들어져요. 얼굴을 만들고, 그 얼굴과 어울리는 몸을 만들고, 몸에 어울리는 손을 만드는 식으로요.”
가끔은 억눌러 둔 ‘손의 리얼리즘’을 풀기 위해 사실적인 인형을 만든다.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다. “체코 시절 트램 정거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해 작은 꼭두를 만들었어요. 한동안 섬세한 작업을 하지 않아서인지 누구도 제가 만든 거라고는 상상을 못하더라고요.” 그 때 한국 여성 이름의 이니셜을 딴 문 작가의 ‘부캐’가 태어나 체코에서 전시를 열었다. 전시를 진행하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만난 트램 정거장에 인형 사진과 함께 ‘이 사람을 찾는다’는 포스터를 붙였다. “35명 중 8명이 왔어요. 그 중 트램에서 매일 아침 만나던 아저씨가 유일하게 절 알아보더라고요.(웃음)” ‘부캐’의 이름은 지금도 비밀이다.
크든 작든 그의 손을 타는 모든 오브제는 “생명력을 가진 소재”를 사용한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나무가 아닌데 나무인 척하는 것, 철이 아닌데 철인 척하는 것, 사람이 아닌데 사람인 척하는 거예요. 아무리 싸구려 나무라도 나무여야죠. 나무 문양을 한 플라스틱은 싫더라고요. 살아있는 소재로 마리오네트를 만들면, 다시 살리는 기분이 들어요. 죽어 있는 소재를 사용하면 그건 인형도 무엇도 아니에요.”
그의 숨결이 담겨 태어난 마리오네트가 긴 줄에 의지해 나타나면 공간은 마법처럼 새로운 세상이 된다. 이 곳은 문 작가에게도 가장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저와 가장 잘 맞는 옷을 찾아 다녔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주류에서 비주류로 가게 된 거죠. 장르는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비주류로 넘어왔지만, 저한테는 너무나도 딱 맞는 옷이었어요. 제겐 이곳이 ‘주류’인 세상이고,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예술적 언어예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프롬프트의 신법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9/01/news-p.v1.20260901.203c531a96884d4da174595cad521d59_T1.png?type=h&h=240)
![자산가의 저력은 하락장서 나타난다…위기 속 기회 찾는 ‘힘’ [큰손 따라잡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8/31/news-p.v1.20260831.a0fa168d036d4658b6cb03a0502c0de4_T1.jpg?type=h&h=240)
![“고3 딸 학원비 40만원만” 끝내 외면한 전처…자식 마저 버린 ‘나쁜 부모’와 싸우는 그들 [세상&플러스]](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08/29/news-p.v1.20260829.87d95bef732846b383020b75a70f53a5_T1.pn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