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줄로 찰나의 깨달음을 담아내는 하이쿠는 ‘침묵의 언어’로 불린다. 17자에 사물과 자연, 삶의 비의에 닿는 단단함과 유연함은 매력적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재일교포와 결혼, 일본에서 70년을 살아온 구순의 윤득한 씨는 “순간을 진공 팩으로 잡아내”는 그 마법에 빠져 하이쿠로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기록해왔다.
여행지에서 잡히는 대로 휴지조각, 영수증, 신문쪼가리 등에 쓴 하이쿠들을 모아 펴낸 ‘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평사리)는 저자가 세상 구석구석을 다니며 만난 소중한 인연과 지나온 시절을 하이쿠와 함께 담아낸 에세이다. 하이쿠 한줄로 남았던 추억과 사람과 풍경이 다시 세밀화로 생생하게 재현되며, 열정적이고 호기심 많은 할머니가 경험한 아름답고 경이로운 “천국의 옆집”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저자는 마흔 한 살, 바쁘게 살아온 인생에 허무함을 느껴 여행을 시작했다. 1970년 첫 여행지 파리에서 며칠 뒤 로마에 도착한 그는 한 소박한 호텔에서 활달한 유숙객들을 만나 ‘동양에서 온 공주’로 불리며 며칠간 환상적인 시간을 보낸다. 남자 넷과 ‘공주’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하고 바를 돌며 순진무구한 시절로 돌아간다. 마침내 떠나는 날, 그들은 숙박비를 흥정하는 ‘공주’가 돈이 없어 깍는 줄 알고 대신 숙박비를 내주는 호의까지 베푸는데, 설렘과 그리움은 떠나온 자의 몫일까?
여행의 이유와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으나 윤 할머니의 여행이야기의 특별함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 있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그들로 인해 ‘지복의 시간’으로 아로새겨진다.
1971년 오리지널 액세서리 사업을 하던 때, 파리에서 민박을 하며 오가던 식품가게에서 만난 젊고 아름다운 연인 조젯과 피에르, 삼바의 나라 브라질에서 온 순수하고 우아했던 화가 데이지와의 깊은 우정과 그녀의 죽음, 영국 민박집에서 치매 모친을 돌보던 젊은 첼리스트가 그를 위해 들려준 엘가의 ‘사랑의 인사’, 프랑스 친구와 지중해 클럽에서 바캉스를 보내다 발목을 삐는 바람에 병원과 클럽 주변인들로부터 친절과 호의를 받은 이야기들은 사람의 온기를 전한다.
저자는 “'나'라는 사람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사업이 바쁘고 잘되어서 모든 일이 내 능력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옆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옆에 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경계인으로서의 삶도 이야기들 속에 포개지는데, 그는 낳아준 한국과 대부분의 인생을 살게 해준 일본에 똑같이 애정을 드러낸다. 역사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한발짝씩 양보를 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배워보자고 권한다.
책에는 일제시대, 어머니로부터 몰래 아궁이 앞에서 한글을 배운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을 맞닥뜨렸던 상황, 피난길 대구에서 교수의 도움으로 육영수 여사의 영어 과외를 하게 된 사연,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영화를 만들겠다며 리더스다이제스트를 통째로 외웠던 학창시절 등 한국에서의 시간도 되짚었다.
저자는 맺는말에서 “내 나라 한국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어 무척 기쁘다”며,“칠십 년 가까이를 일본에서 생활하다 보니 우리 글로 책을 쓰는 게 소원이었지만 언감생심이었다”고 털어놨다.
이 책은 한국인인 저자가 일본어로 쓰고, 일본인인 츠치다 마키가 한글로 번역한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여든셋에 가우디성당의 TV미사중계를 보고 나홀로 스페인여행을 할 정도로 당찬 윤 할머니 스토리는 배우 윤여정의 활약 못잖게 유쾌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윤득한 지음, 츠치다 마키 옮김/평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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