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건 옛 소련 연방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진단이 이제까진 지배적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거부하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에도 브레이크를 걸려는 심산이라는 해설도 뒤따른다. 잿더미화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옛 소련 국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러시아제(製) 탱크가 대표 증거로 쓰였다.
틀리지 않은 논리다. 다만, 푸틴의 목표가 더 다층적이라는 분석이 있어 관심을 끈다. 푸틴은 세계가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넷 제로(Net zero·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탄소배출량을 0으로 만듦)’를 러시아엔 실존적 위협이라고 판단한다고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인 채텀하우스는 풀이했다.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를 수출해 경제를 부흥시키고 정권 기반을 공고히 한 푸틴 입장에선 세계 탄소배출량의 88%를 차지하는 130여개국이 넷 제로를 실현하면 러시아의 ‘에너지 패권’은 소멸하는 것이다.
푸틴과 관계가 긴밀하다고 알려진 싱크탱크 발다이(Valdai) 클럽이 2년 전 낸 보고서는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치를 정한 파리기후변화협약이 2030년까지 러시아 경제 성장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했다. 전기차의 발전도 러시아 석유 수출업체에 추가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주 요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제조·서비스·농업·식품생산을 아우르는 ‘포괄적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러시아가 돌파구를 찾으려면 자국 내 식량 생산을 늘려 경제를 떠받쳐야 하는데, 일부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의 독점으로 농업분야 경쟁력이 마땅치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후변화 탓에 러시아 내 곡물 생산량도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여건이어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노렸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판단한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니’로 통한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경지만 해도 4200만㏊다. 한국 면적의 4배가 넘는다. 세계 3대 곡물 수출국으로, 5억명의 먹거리를 댄다. 특히 북아프리카, 중동,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등 식량부족 국가는 우크라이나 의존도가 높다. 당장 아프리카가 40년 만에 최악의 가뭄 때문에 200만명의 아동이 굶어죽을 위기라고 유엔은 경고하고 있다.
러시아로선 옛 소련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으면 ‘식량 패권국’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누가 밀 공급을 통제하느냐가 세계 정치 지형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전망에 맞춰 러시아가 좌고우면없이 행동에 나섰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리는 아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시발점인 돈바스 땅을 포기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 농업생산의 23%를 책임지고 있는 알짜배기다. 에너지 패권을 잃을 판에 이념이 아닌 식량안보를 중심에 둔 경제 구조 확립이 푸틴의 머릿속을 지배한다는 증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탈(脫)나치화에 경도된 게 아니라 철저히 경제 셈법에 따라 전쟁에 올인하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탄소 중립에 불만을 품은 국가가 조직적으로 나선 세계 최초의 전쟁이라는 진단이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와 등골이 오싹해진다.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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