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글로벌 이슈는 거의 모두 디지털 패권 경쟁 및 AI와 연관되어 있다. ‘미국-이란’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도 드론, 로봇, 인공지능이 얼마나 사용되는 지와 함께 미래 군사 패권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미국과 브라질 간의 디지털 결제 수단(브라질의 PIX)을 둘러싼 갈등은 급기야 양국 간 관세전쟁을 초래했고 브릭스(BRICS) 국가들의 디지털 결제망인 브릭스 페이(BRICS PAY)의 도입 일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이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인 아카네 도모코(赤根 智子)에 대한 제재를 단행한 것도 디지털 시대 빅테크의 지배력과 이를 지배하는 패권국과 국제 기구, 그리고 개별 국가의 시민 보호 문제 등 다양한 논쟁을 낳고 있다.
현재 디지털 및 첨단 기술 패권과 관련해서는 아주 단순하게 ‘미-중 AI 패권 경쟁’ 혹은 ‘미국식 빅테크(Big Tech)와 중국식 레드 테크(Red Tech)’의 대결이라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첨단 기술 패권 경쟁을 ‘국가 간 경쟁’ 혹은 ‘기술과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경쟁’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아주 강력한 이분법적 대립주의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지정학적(Techno-geopolitics)’ 프레임과 ‘이념 기술주의적(Techno-ideological)’ 시각은 현재 글로벌 사회가 디지털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변화와 문제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이를 설명하는 시각은 AI로 대변되는 첨단 기술 전쟁의 문제를 알고리즘, 매개변수, 컴퓨팅 파워, 데이터 센터, 그리고 국가가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 등 기술적· 공학적·지정학적 문제로 국한시킨다.
빅테크와 레드 테크의 경쟁이라는 성격 규정은 냉전 시대의 이분법적 경쟁을 디지털 전환과 새로운 문명 경쟁 시대에 다시 회귀시키는 듯한 적대적 경쟁의 틀 내에 우리의 사고를 국한시킬 위험이 크다.
현실은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을 훨씬 뛰어넘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국제 조약에 의해 국제적 공의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던 국제형사재판소(ICC) 고위 재판관들을 제재하면서 나타난 일차적인 결과는 제재를 당한 판사들이 평소에 사용하던 빅테크 기업의 인프라에 대한 접근 차단을 당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제재 집행은 빅테크의 디지털 아키텍처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기업 플랫폼들이 미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접근을 차단하면서, 국제 사법 기관들은 오픈소스 기반의 디지털 대안을 찾아 헤매야 했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들은 자국 정부의 행정명령을 따라 국제기구 판사의 일상을 지워버릴 수 있는 ‘디지털 전제 권력’의 집행관으로 기능했다.
우크라이나 전장(戰場)에서는 빅테크 소유주인 일론 머스크의 자의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라 스타링크가 언제, 어디까지 접속이 가능할 것인가가 결정되고 이것이 전투에 영향을 미친다.
AI 관련 빅테크인 앤스로픽(Anthropic)은 강력한 사이버 보안 모델인 ‘미토스(Mythos)’를 개발한 후 이의 부정적 파장에 대한 우려 때문에 미토스에 대한 접근을 그들의 기준과 분류에 따라, 비록 임시적이었지만, 일부에게만 선별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미국 빅테크들이 미국의 행정명령을 따르는 것이나 일론 머스크나 앤스로픽이 자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의 기관인 의회, 국제 조약, 그리고 시민 여론을 반영하는 다양한 공론장을 완전히 우회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은 사적(私的)이고 선출되지 않은 기업 집단이 이제 글로벌 안보의 일차적 판정관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례들은 ‘미국 대 중국’이라는 지정학적 경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대 국제 정치 및 국제 관계의 문제점과 주권 국가의 시민 보호의 문제와 패권국의 디지털 인프라 독점 및 통제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다.
그렇다면 중국 레드 테크의 ‘오픈 소스’, ‘오픈 웨이트’ 열풍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레드 테크의 모델들은 겉으로는 개방형 모델의 외피를 둘렀다. 경제성도 미국 빅테크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국가 감시와 검열의 알고리즘을 품고 있다. 결국 이 모델 역시, 얼굴만 바꾼 채 개인을 또 다른 통제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라는 비판이 많다.
진정한 의미의 ‘오픈 소스(Open Science)’는 학습 데이터와 훈련 과정 전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오픈 웨이트는 가중치만 열어둔 채 내부 데이터의 편향이나 검열 메커니즘을 외부에서 검증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오픈 웨이트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나 개발도상국에 ‘저렴하고 강력한 기술 대안’으로 매력적으로 다가가지만, 실상은 권위주의적 정보 조작 기술의 글로벌 확산 통로로 작동할 위험이 크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이는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인류가 직면한 위협이 단순히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간의 경쟁에 국한하지 않으며, 주권과 민주적 책임성이 사적(私的) 코드와 기업 인프라에 체계적으로 예속되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국가의 제재와 기업 인프라가 교차하는 지점은 개인, 국가, 그리고 자본 간의 관계가 마주한 심각한 위기를 드러낸다. 국가는 기업 독점을 역외 집행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테크노 플랫폼들은 준주권적 수준의 거부권을 행사한다. 시민과 국제기구는 이대로라면 책임을 묻기 어려운 거대 기업의 사적(私的) 이용 약관에 종속되는 처지가 된다. 이러한 환경이 지속되면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고 국제법에 책임을 진다는 전통적인 사회계약은 붕괴할 위험에 처한다.
지정학, 그리고 기업 거버넌스의 지평 너머에는 디지털 경쟁과 첨단 기술 경쟁, 그리고 AI 시대라는 이름으로 방치해 온 자율적 도덕 주체로서의 개인의 해체가 있다. ‘미·중 AI 패권 경쟁’이라는 기존의 이원론을 넘어, AI 시대의 구조적 모순을 입체적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경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 본질은 ‘누가 알고리즘의 가치와 정의를 독점하는가’의 문제이다.
때문에 미국 빅테크의 폐쇄적 통제 전략을 옹호하는 논리에 갇히거나, 중국의 저비용 오픈 웨이트를 무조건적인 ‘오픈소스 민주화’로 오인하는 시각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기술의 개방성(Openness) 그 자체와, 그 기술에 내재된 권력 구조 및 라이선스의 정치적 속성을 철저히 분리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과정과 집행 권한을 미국과 중국 혹은 빅테크와 레드 테크가 아닌 국제 사회가 갖도록 글로벌 AI 거버넌스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 거론되는 형태는 다양하다. 미국은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 산하에서 증권업계를 감독하는 금융산업규제국(FINRA)과 유사한 독립기구를 만들자는 입장이다. 다른 나라나 시민사회에서 나온 아이디어 가운데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 기반 분쟁 해결 메커니즘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현장 사찰 및 투명성 검증 권한을 결합한 모델도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형성된 거의 모든 글로벌 거버넌스 기구가 그렇듯 AI 거버넌스 기구의 결과물도 AI 패권국들의 향배와 의중이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AI는 21세기 문명 및 산업의 틀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미칠 기술이라는 평가가 많다. 때문에 새로운 AI 거버넌스를 과거처럼 강대국 중심의 거버넌스 체제가 아니라 국제 인권법과 민주적 거버넌스 기준에 기초해 작동하게 하려면 중견 국가들의 목소리와 기술력이 이들 AI 패권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커져야 한다.
바로 여기에 한국, EU, 일본 등 민주주의 체제이면서 기술 선도 중견 국가들인 나라들의 역할과 기여의 여지가 있다. 한국과 같은 기술 선도 민주주의 중견국들은 디지털 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인간 중심 AI(HAI, Human-Centered AI)의 발전 방향을 유지하면서 빅테크(Big Tech)와 레드 테크(Red Tech) 사이에 갇힌 글로벌 사회에 새로운 틈새를 제공할 수 있다.
AI로 상징되는 디지털 전환 시대에 국가적으로 3대 메가 프로젝트와 소버린 AI 전략을 추진하는 한국이 글로벌 사회에 기여하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려면 기술 자체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정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시민적 연대와 법치주의를 통해 기술의 아키텍처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대체 불가한 주권(sovereign)을 재구축하는 것이 기술 경쟁력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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