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경주에 대해 “신라 전성기에는 서라벌에 17만8936호가 있었고, 금입택(황금 입힌 집) 35채가 있었다”고 썼다.

지금은 3인가구가 일반적이지만 1960년대만 해도 7~8인가구(당시 합계출산율 ‘5~6’)가 대세였으며 1990년 말까지도 가족 수는 4~5명이 주류였다.

8~9세기엔 자녀 수가 경제력이자 권력이었으므로 경주 내 17만8936호를 6인 가족으로만 잡아도 107만3616명이고, 어르신 한 명을 포함해 7인 가족으로 잡으면 125만2552명이라는 인구수가 나온다. 9세기 서라벌 인구가 100만명을 넘었다는 데엔 이견이 없다.

경주에 인구가 많았던 것은 실크로드의 종점, 그것도 육상 실크로드와 ‘V’자형 해상 실크로드 두 개 모두의 종점·기점 역할을 하는 거점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경주는 그리스 아테네,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사라센제국 수도 바그다드, 당의 장안(지금의 시안)과 함께 문물과 풍요가 넘치는 세계 5대 도시였다고 많은 사학자는 전한다. 당시 베네치아와 베이징은 명함을 내밀 처지가 못 됐고 오히려 이란의 이스파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가 G7 반열에 들 만했다.

사마르칸트 ‘크즈라르테파 유적’에 대해 한국문화재재단과 우즈베키스탄 고고학연구소가 공동 발굴조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의 공적 원조 차원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앞으로 사마르칸트에서 문화유산 보존·관리센터 구축, 크즈라르테파 유적에 대한 공동 발굴조사를 통한 현지 전문가들의 역량 강화, 문화유산 디지털 기록 및 인벤토리 구축, 문화유산 연계 관광자원 개발사업 등을 진행한다.

이곳에 살던 소그드(Sogd)인은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으로, 우리나라까지 이어진 실크로드를 통해 국제무역을 주도했다. 소그드는 우리 말로 ‘호(胡)’라고 표현한다. 경주 용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물토용 28점은 하나같이 소그드류 호모(胡帽)를 쓰고 있다. 앞으로 약간 휜, 뾰족한 모자다. 한때 신라 등 삼한에선 멋진 것 앞에 ‘호’를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궁중음악은 ‘호곡’, 귀족식단은 ‘호식’, 유행에 앞서나가는 귀부인의 패션은 ‘호복’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지금이 한류라면 당시는 ‘호류’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실크로드를 누비며 대릉원에서 발굴된 로마의 유리제품과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구슬, 흥덕왕이 한때 금수 조치를 취하기도 했던 투르크(서진한 돌궐) 양탄자를 수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경주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출토된 장식 보검은 사마르칸트 일대 사산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우리와 공유하는 문화유산이다.

처용은 헌강왕이 발탁한 신라의 중견관리다. 신체건장한 서역인들은 귀화해 왕실과 귀족의 무관이 되거나 생활문화 아키텍처를 개선하는 컨설턴트로 기용됐다. 황룡사 탑돌이를 하다가 눈 맞은 사람들끼리 국제결혼도 빈번했다. 그리고 서역인들은 괘릉, 흥덕왕릉 등의 무인석상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중국이 ‘일대일로’ 루트를 임의로 만들어 ‘실크로드’라고 주장하며 약소국들에 옛 인연 운운하며 ‘투자할 테니 이권을 달라’며 유혹하고 있다.

실크로드에서 한국을 빼고 자기 입맛대로 왜곡한 중국의 제국주의적 전술은 마음의 출발이 나빠서였는지 속속 반기를 드는 나라가 나오고 있다. 이런 때, 우리도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을 더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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