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3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3
강준호를 기다리는 30분은 3년만큼이나 길고도 지루했다. 쌍안경 화면 속으로는 ‘중조우의교’를 통해 신의주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 국제열차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발짝 오른쪽으로 돌면…북한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는 주민들의 모습과 짐 검사를 하는 군인들의 추레한 모습이 화면 가득 담겨오곤 했다.
“오! 댓츠…팔레하농 처뇨!”
움라우트 패튼 회장이 강유리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서툰 우리말…아무래도 동행한 예원희에게 즉석에서 우리말을 배운 것 같았다. 그가 이끄는대로 어깨를 돌리자 과연 압록강변에서 빨래하는 북한 여자의 모습이 화면 가득 담겨왔다.
“빨래하는 처녀인지, 빨래하는 아줌만지 어떻게 알아요?”
강유리는 이렇게 대답하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쩌자고 이리도 신경질적으로 반문을 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움라우트 패튼 회장을 만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던 예원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쓰 강 언니, 왜 그러시는 거야요? 호상 간에 싸움질이라도 했습네까?”
“아니야, 싸움은 무슨….”
“그런데 어째서 세계 제일가는 갑부 신랑에게 성난 말벌처럼 왱왱 거리십네까? 무슨 불만 있습네까?”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그랬지?”
강유리는 머쓱해져서 휘휘 쌍안경만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강변을 따라서 산책하는 남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유람선과 북한 선박 간에 은밀히 이루어지는 선상 장사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물고기를 잡는 북한 어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마음의 안정을 찾기란 글러먹은 모양이었다. 이게 다 ‘장인어른’ 운운하던 움라우트 패튼 회장의 말 때문이었다. 누군들 순정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나? 홍도가 울던 까닭은 돈 때문이고, 홍도가 속아넘어간 것은 사랑이고…강유리는 이 대목에서 문득 유호성의 모습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유호성…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구조요원에게 실려 가서 어찌 되었을까? 어디 다친 곳은 없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다가서는 또 한 명의 모습. 바로 유호성과 함께 구급 헬기에 올라타던 현성애의 모습이었다. 감히 유호성과 모래밭에서 뒹굴어? 뻔뻔스런 계집애 같으니!
강유리는 잠시 쌍안경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째서 이 평온한 순간에 유호성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도 어째서 뻔뻔스러운 현성애의 모습이 도중에 끼어드는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 반가워라. 강유리 선수 아냐?”
어디선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리는 얼떨결에 쌍안경에 눈을 댄 채로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는데 웬걸! 눈사람이 엎어진 형태로 드러나는 쌍안경 화면 속에 커다랗게 들어있는 상은 바로 HY훌푸드 신희영 회장의 얼굴이었다.
“어머, 회장님! 단둥엔 어쩐 일이세요?”
“나? 우리 아들 호성이 경주모습을 보러 왔지요. 내일 아침에 경주 차들이 북한과 중국 국경을 넘게 된다고 신문마다 난리야, 난리.”
아마 신희영 회장은 유호성 선수가 사고를 쳐서 구조헬기에 실려 간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는 어쩌면 유호성이 선두로 압록강대교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튼 ‘맹모삼천지교’든가? 맹자 어머님처럼 아드님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에둘렀지만 그녀를 본 순간 강유리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야 말았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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