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미술관‘ 글자, 그림이 되다’展

고산 황기로 초서작품 ‘송왕영’ 美 샘 프란시스 액션페인팅 등 동서양 서예·추상화 짝이뤄 전시

조선시대서 60년대 추상미술까지 회화 속 서예정신 의미 재발견

손글씨보다는 휴대폰 자판이 익숙하고, 한자보다는 영어를 더 친숙하게 느끼는 게 요즘 세대들이다. 그러니 동양 정신문화의 집약체인 서예는 안중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동양 조형예술의 뿌리인 서예는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가 꽤 높다. 푸른 눈의 추상화가 중 서예기법을 작업에 차용한 예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추상화를 한자리서 살펴보는 특별전은 무척 반갑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포스코미술관은 서예를 매개로 동서양 미술의 관계를 살펴보는 ‘글자, 그림이 되다’전을 22일 개막한다. 오는 10월 22일까지 두 달간 열리는 전시는 동서양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붓이 노래하고, 먹이 신명나게 춤추는 ‘필가묵무(筆歌墨舞)’의 경지를 만끽해보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세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 우선 동양의 서예와 난해한 추상화를 전시장에 나란히 내걸음으로써 서예는 그림처럼, 서양의 추상화는 마치 서예처럼 다가오도록 했다. 양극단을 함께 음미하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보다 근사한 예술체험이 또 있을까 싶다.

이를 테면 16세기 선비화가 고산 황기로의 초서 작품 ‘송왕영’은 이우환의 추상화 ‘선으로부터’와 함께 내걸렸다. 분명 한시를 풀어쓴 초서이지만 이우환의 추상화와 함께 전시되자 고산의 글씨 또한 영락없는 한폭의 추상화다. 탁월한 필법의 소유자인 고산은 이 작품에서 물 흐르듯 써내려가면서도 꺾을 땐 꺾고, 돌릴 땐 과감히 돌리는 자유자재의 초서를 구사했다.

만년에 낙동강 서쪽 산자락에 정자를 짓고, 필묵과 독서를 즐겼던 그 은유자적에서 우러난 글씨는 모든 걸 초탈한 듯 우아하다.

운보 김기창이 사람 키만한 붓으로 커다란 화폭을 휘몰아치며 그려나간 ‘점과 선’ 시리즈는 이탈리아 화가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과 짝을 이뤘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은 운보의 역동적인 검은 선은, 수직으로 녹색의 캔버스를 예리하게 내려 그으며 칼자국을 낸 폰타나의 작품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서예에서 기반한 운보의 그림이 더 추상화에 가깝고, 폰타나의 명징한 추상화는 가는 붓에 온 정신을 투입해 그은 일획의 선(線)같다.

이 밖에 먹으로 인간형상을 쌓아올려간 서세옥의 수묵화는 미국 작가 샘 프란시스의 액션페인팅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샘 프란시스의 추상화 또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어서 두 작품은 맥을 같이한다.

이번 전시는 서예야말로 동양 정신철학과 예술의 근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문자를 예술적 소재로 직접 사용하는 서예는 옛 선비와 문인들에겐 덕을 쌓는 자기수양의 방편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진리를 담는 행위였다. 이렇듯 서예는 문학적 내용의 발현이자, 아름다운 회화적 감각도 드러내는 있음을 출품작들은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는 20세기 추상미술 중 동양 서예에서 발원한 것이 적지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관 측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추상으로의 변화’ 속에 내재된 동양의 서예정신을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 추상미술까지 두루 조망하고자 했다. 따라서 출품작은 매우 다양하다.

16세기 서예가 운봉 백광훈을 필두로 원교체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 안평대군,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위창 오세창의 작품이 나왔다. 파리에 동양화 붐을 일으키고, 문자추상을 개척했던 고암 이응노의 작품과 운보 김기창의 선 굵은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또 서화일치를 넘어선 남관, 윤형근, 윤명로, 오수환의 회화도 출품됐다. 외국작가로는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과 피에르 술라주, 미국 작가 A.R 핑크의 회화가 출품됐다. 서예가 지닌 추상성을 작품에 응용한 이들의 작품이 전통서예와 나란히 전시됨으로써 ‘동양 서예정신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게 한다. 무료관람. (02)3457-1665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