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기훈 기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막노동 일을 하면서도 5수 끝에 1996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 합격한 장승수 씨. 장 씨의 자서전은 174쇄를 찍고 판매고 150만권을 넘길 정도로 재수생들의 ‘바이블’이 됐다.

오늘도 수많은 수험생들이 ‘제2ㆍ제3의 장승수’를 꿈꾸며 재수ㆍ삼수를 택한다.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공부에 몰두하지만 말처럼 공부가 쉬운 것은 아니다. 되레 공부가 쉽다는 발언은 모든 재수생들의 염장을 지르는 말이기도 했다.

“재수생들을 없애야 한다. (대학에) 떨어진 애들 재수ㆍ삼수학원에 보내는데 다 사회적 비용이다. 우선 공장이나 농촌에서 일하게 해야 한다. 1, 2년 일하고 그 성적 갖고 대학가라 이거야.”

지난 2010년 여당의 한 유력 정치인은 이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의 말에는 재수생은 ‘놀고 먹는 애’라는 부정적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자신이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재수생의 현실은 그러나 백조가 아닌 ‘미운 오리 새끼’일 뿐이다.

재수생은 서럽다. 실력 발휘를 못한 것도, 재수를 해야한다는 현실만으로도 억울한데 사회마저 ‘잉여’ 취급이다.

“누구 아들은 서울대를 갔다더라, 누구 딸은 미국으로 유학 간다더라.” 엄친아ㆍ엄친딸들은 왜 그렇게 많은 지. 또 재수생이라고 사랑을 모를까, 하지만 연애는 사치일 뿐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혀야만 한다. 신록이 푸르른 캠퍼스의 낭만은, 그들에게 유예된 행복이다.

하지만 요즘 재수생이란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누릴 수 있는 특전이 됐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수생의 사교육비는 연간 760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2009년 자료에 따르면 재수생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은 일반계고 65만9000원, 전문계고 37만1000원이다. 하지만 이는 통계상 숫자일 뿐, 전문 기숙학원의 월 수강료는 2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부모 등골이 휠 지경이다.

이에 가구 소득은 재수를 결정하는 절대 조건이 됐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월 평균 수입이 600만~800만원인 가정의 경우 응답자의 25.2%가 재수한다고 답했으나 월 200만원 미만은 8.8%에 그쳤다.

부모의 막강 ‘화력 지원’을 받은 재수생들이 입시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이다.

실제 2014학년도 서울대 정시에서 재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46.1%로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면 재수생 비율은 삼수 이상 9.4%을 포함해 전체의 52.9%에 달했다.

문제는 ‘재수 광풍’이 철저한 학벌위주 사회의 방증라는 데 있다. 학생들의 진로 고민에서 비롯된 경쟁이 아니라 견고한 대학 서열의 틀에 의한 경쟁이라는 것. 대학 ‘간판’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믿음과 그 ‘간판’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그릇된 사회문화가 만든 병폐다.

이처럼 한 줄로 선 사회에서는 모두가 행복할 순 없다. 승자는 뒤로 밀려나지 않을까 불안해야 하고 패자는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해 불행하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는 ‘입시전쟁 잔혹사’란 책에서 “SKY 출신의 사회요직 독과점은 한국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교육 과잉과 입시전쟁의 주범”이라며 입시를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라고 표현했다.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떳떳하게 살 수 있다면 이처럼 많은 청춘이 재수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기왕에 재수의 길로 들어선 이들이 있다면 드라마 ‘9회말 2아웃’의 대사를 빌려 위로할 수밖에 없다. “빛나는 청춘이잖냐. 희망이 밥이고, 도전은 생명이고, 기적은 옵션이고, 실패는 거름이고 그런 때 아니냐.” 재수생 여러분들, 부디, 힘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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