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배두헌 기자] #1. 2000년 4월 3일. 열 살 남짓한 초등학생이 돼지저금통을 손에 들고 전북 전주시 노송2동사무소를 찾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학생이 기탁한 돼지저금통엔 58만4000원이 들어 있었다.
#2. 이듬해인 2001년 12월 6일. 이번에는 20대 초반 여성이 이곳을 찾아 742만8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기부하고 사라졌다. 그 이듬해부터 이 ‘천사’는 아예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는 말만 남기며 15년동안 총 4억여원에 달하는 성금을 기탁해왔다. 해를 거듭하며 기부 금액이 커지면서 현금 뭉치의 비율이 높아졌지만, 동전 가득한 돼지저금통은 늘 함께 했다.
돼지저금통은 이렇게 가슴 따뜻한 사연의 주인공을 도맡아 온 저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저축보다는 소비가 더 권장되고, 동전 사용이 줄어들면서 돼지저금통은 우리 일상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은행 이자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 ‘티끌모아 태산’이 강조되던 저축의 시대에는 집집마다 돼지저금통이 하나씩 있었다.
가장 흔했던 빨간 돼지저금통에 땡그랑 동전을 한푼 두푼 넣으며 아이들이 꿈을 키우던 시절이다.
아이들은 설날 받은 세뱃돈을 꼬깃꼬깃 접어 돼지저금통 안에 넣은 뒤 뿌듯해했고, ‘돼지’ 배가 꽉 차면 배를 갈라 쥔 목돈을 은행에 저축하거나 사고 싶었던 물건을 샀다.
형제자매의 돼지저금통을 뒤집어 탈탈 털어 동전 몇개를 토해내던 모습도 그시절 한번쯤 경험해 봤을법한 추억이다.
하지만 동전 제작단가가 높아지면서 돼지저금통은 동전 유통을 가로막는 주범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은행 창구에서도 동전 가득한 돼지저금통은 점점 환영받지 못하게 됐고, 돼지저금통에 얽힌 추억도 서서히 자취를 감춰갔다.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돼지 저금통에 이어, 한장 한장 넘겨가며 저축한 돈을 확인하던 종이통장 역시 오는 2017년 9월부터 발행이 중단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인터넷과 모바일뱅킹 확산으로 종이통장의 필요성이 크게 줄었다는 판단에서다.
1897년 국내 첫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이 생긴 이래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던 종이 통장이 120년만에 없어지는 것이다.
불과 10~20여년 전만 해도 은행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통장을 차곡차곡 정리한 뒤 뿌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밥할머니가 수십년간 모은 저금통장들을 통째로 기부하며 우리의 가슴을 적신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전자금융시스템의 발달로 종이통장도 돼지저금통과 마찬가지로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badhone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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