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헤게모니(패권)’의 국제질서가 ‘G제로(무극화)’ 시대로 급속이동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폐막한 핵안보정상회의는 주요 8개국(G8ㆍ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에서 러시아를 축출시킴으로써 사실상 G8체제가 16년 만에 해체됐음을 공식화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 ‘양극’의 신(新)냉전 회귀로 받아들여졌지만, 실상은 ‘무극(non-polar)’의 G제로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 된 셈이다.
아사히신문은 26일 “G8체제가 붕괴됐다”며 “글로벌 다극화가 가속화하면서, 그 질서의 근간이 표류하는 ‘G제로’가 현실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G제로(G0)란 특정 국가나 그룹의 영향력과 헤게모니가 쇠퇴해 뚜렷한 주도세력이 없는 무극화 국제질서를 일컫는 말이다. 위기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의 이언 브레머 회장이 2011년 다보스포럼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국가가 없는 상태를 ‘G제로’로 표현하면서 유래했다. 브래머 회장은 당시 “미국, 일본, 유럽 등 기존에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했던 국가들이 현재 자국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글로벌 거버넌스를 할 여력이 없다. 또한 브릭스 국가들도 국제적 문제를 책임지려 하는 열망이 별로 없다”며 G제로 상태를 설명했다.
▶美ㆍ러 비방전…리더십 부재 방증=미국과 러시아의 극한 대립은 헤이그에서도 이어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5일 핵안보정상회의 이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이웃나라에 위협을 가하는 지역 패권”이라고 격하했다. 그는 “(러시아가 이웃나라를 침공한 것은) 강함이 아닌 나약함을 드러낸 것”이라며 “러시아는 주변국에 큰 위협이지, 미국에게 제1 위협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은 이웃나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관계강화를 위해 이웃나라를 침공할 필요가 없다”며 크림반도를 무력장악한 러시아를 맹비난했다.
앞서 G7은 24일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첫 회동을 갖고 러시아를 국제회의체에서 제외하고 추가제재를 강화하는 ‘헤이그 선언’을 채택했다. G8에서 사실상 러시아를 축출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G8에 집착하지 않겠다”며 즉각 반박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G8은 비공식클럽(모임)이기 때문에 누가 회원카드를 발급하는 것도 아니며 애초 회원을 쫓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동안 “G8이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지 않고 하나의 의견이 지배하는 구조”라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에 대한 자원ㆍ에너지 등 주요산업에 대한 추가제재도 재천명했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오바마의 ‘힘 자랑’에 유럽은 가려져 있다”며 유럽이 미국의 제재를 따라갈지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에 대한 본격 제재는 곧 유럽 경제에 직격탄이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미 “(러시아에만 타격을 주는) 기적은 없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와 관련 “G8균열은 미국의 역할이 약화된 신호”라며 “헤게모니 없는 국제질서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휘둘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G8붕괴…물만난 신흥국=G8에서 러시아 축출이 큰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흥국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방 선진국 모임인 G8보다 중국과 인도가 포함된 주요 20개국(G20)의 역할이 커진 탓이다.
5개 주요 신흥 경제국인 브릭스(BRICSㆍ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이번 핵안보정상회의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브릭스 국가는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반대하고 유엔을 통해 사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채택했다. 이들 국가는 성명에서 “적대적인 언사와 제재, 그리고 강압은 지속 가능하고 평화적인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국은 글로벌 리더십 부재 틈바구니에서 반사이익을 톡톡히 보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24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중립을 유지한 채 “대결하지 않고 다투지 않는 서로를 존중하는 윈윈관계”를 촉구했다. G8의 종말을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중국이 부상하면서 G8의 영향력은 이미 축소됐다”며 “러시아를 제외한 G7이 국제여론을 선도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되찾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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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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