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상수 기자]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 연일 뜨겁다. 여야가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하면서 선거구획정, 쟁점법안 처리를 두고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 있느냐가 핵심. 정의화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가 없다면 선거구획정은 직권상정을 강행하고, 쟁점법안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선거구 획정이 무산되면 ‘국가비상사태’이지만 쟁점법안은 그렇지 않다는 것. 청와대의 개입을 두고 삼권분립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도 단호하다.

청와대와 여당의 입장은 다르다. 쟁점법안이 연내 처리되지 않으면 ‘국가비상사태’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을 ‘입법비상사태’라 규정, 국회의장이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압박한다.

▶쟁점 하나, 국가비상사태인가 = 가장 큰 차이는 해석 차다. 국회법에 따르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은 ▷천재지변 ▷국가비상사태 ▷여야 교섭단체 합의 등으로 규정돼 있다. 여야 합의가 있다면 모든 문제가 간단하지만, 합의가 어렵다는 전제하에 논란은 ‘국가비상사태’의 해석 차다.

선거구 획정이 무산되면 국가비상사태가 벌어진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다. 야당 내에선 이 역시 반대하는 주장도 있지만, 최소한 국회의장과 청와대, 여당은 공감대를 이뤘다. 올해 말까지 선거구 획정이 안되면 내년 1월 1일부로 현 선거구는 무효화된다. 예비후보 등록도 자격을 상실한다. 총선 자체가 파행을 겪는 국가비상사태란 의미다.

핵심은 쟁점법안 표류가 국가비상사태로 볼 수 있느냐다. 국회의장은 반대한다. 법조계도 대체로 국회의장의 의견에 동의한다. 직권상정뿐 아니라 청와대의 긴급명령 발동이 논란이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제가 어렵긴 해도 국가비상시기라 보는 건 어렵다”고 해석했다. 다른 법조인들 역시 “쟁점법안이 경제에 영향을 주겠지만, 당장 법안이 통과되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 파탄이 일어난다고 볼 순 없다”는 의견이 많다.

국가비상사태란 입장에선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사태와 지금은 질적으로 다른 경제위기라고 진단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냄비 속 개구리’란 말이다.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각종 대외 변수가 한국 경제를 옥죄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종석 여의도연구원 원장은 최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국경제 긴급 현안 보고를 통해 “국내 수출부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당히 구조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외환위기 같은 위기가 올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민간소비 침체, 저출산ㆍ고령화 등과 맞물려 일본과 유사한 장기 저성장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한국경제가 당면한 위기의 실체는 서서히 다가오는 장기복합형 불황“이라며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가 글로벌 교역 구조 변화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원장은 “이 위기가 자각증상 없이 서서히 다가오기 때문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제로성장,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한 후에는 헤어나기 매우 어렵다는 게 국내외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과거와 결이 다른 위기란 의미다. 오히려 위기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과거보다 더 길고 고통스러운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다. 쟁점법안 처리가 만능은 아니지만, 이미 이 같은 법안도 한발 늦은 대처라고 지적한다. 경제분야의 국가비상사태는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쟁점 둘, 국회의장의 역할은 어디까지 = 국회의장의 역할론이다. 정 의장은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게 아니라 법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과거와 달리 직권상정의 권한이 제한적이란 뜻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쟁점법안 표류가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라면, 국회의장으로서 할 수 있는 권한은 마땅치 않다.

나아가 청와대가 개입하는 데에도 정 의장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 의장은 지난 18일 고(故)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영결식에서도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의장님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고 했다. 청와대의 직권상정 요청을 비판한 발언이다. 내용을 떠나 청와대가 입법부 수장의 권한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의미다.

여당 내에선 국회의장의 ‘직무유기’라는 격한 반응까지 나왔다. 친박계인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8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국회의장이) 인기영합이나, 이런 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국회의장으로서 폼만 잡는 것일 뿐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야가 대립하면서 국회가 마비됐는데, 국회의장이 계속 책임을 회피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직권상정 역시 마비된 국회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국회의장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쟁점 셋, 선진화법 무엇이 문제인가 = 결국 이 모든 문제는 국회선진화법과 연계된다. 국회선진화법 이전에는 직권상정이 상대적으로 흔했다. 요건도 느슨했다. 직권상정을 주장하는 배경에도 이 같은 과거 경험이 깔렸다. 과거엔 국회의장 대신 부의장이 직권상정한 사례도 적지 않다. 먼일도 아니다. 2010년 12월에도 국회 부의장의 직권상정으로 예산안을 처리했다.

선진화법이 생기면서 직권상정 권한도 제한적으로 변했다. 몸싸움, 날치기는 사라졌지만, 대신 여야 합의가 없인 법안 통과가 불가능해졌다. 국회 의사과 측은 “기존엔 부의장이 직권상정하기도 했지만, 그땐 선진화법 이전의 상황”이라며 “선진화법 이후 직권상정 요건이 전해진 뒤로는 부의장도 직권상정할 수 있는지 해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선진화법 취지를 살려 여야가 최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식물국회를 방치한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다. 새누리당은 선진화법 위헌소송을 제기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