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국가체제로서 조선왕조가 5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예로써 사회부문이 워낙 취약한 나머지 집권세력의 실정을 비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체제붕괴로 이끌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국가-사회 간의 상대적 능력에 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현재 북한체제가 유지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조선 국가체제의 내부 운영방식이 정책 오류를 걸러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고 다원적이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국왕과 신하들이 공론장에서 정책에 대한 난상토론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모두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내각에 해당하는 의정부, 비판을 주 임무로 하는 삼사(三司), 모든 국정운영을 낱낱이 기록하는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제도화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칠순이 가까워오는 대한민국이지만 과연 국가정책을 조선시대에 비해 더 투명하고 다원적으로 결정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72년의 ‘8ㆍ3 긴급경제조치’를 비롯하여 수많은 국가정책들이 ‘안가’에서 비밀리에 결정됐다. 그것을 정치적 ‘타이밍’에 맞춰 극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충격요법’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1987년 민주주의 이행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양은 변했다. 국가정책을 소수 공직자가 비밀리에 결정하는 것은 민주적인 국정운영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는 국민을 의식해서다. 그러나 중요한 국가정책일수록 극소수 인사들이 모여 비밀리에 결정하는 행태는 여전하다.

작년 10월 부실기업인 대우조선에 4조2000억원을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지원하도록 한 결정이 소위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실세 공직자 몇 사람의 지시로 이뤄졌다. 그보다 2년 전인 2013년에도 역시 부실기업인 STX조선에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4조5000억원을 지원하도록 한 것도 같은 장소, 같은 직책의 인사들에 의해 결정됐다.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낭비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구조조정의 타이밍까지 놓친 것이다. 이런 내막을 밝힌 인사에 대해 ‘배신’이니 ‘정권말증후군’이니 하는 식의 말단 지엽적 흥밋거리 논란으로 다루고 있는 언론도 문제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정책을 결정하려면 때로는 상황파악과 기획조정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선의의 비공개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굳이 회의 장소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청와대 서별관은 공적인 장소다. 비밀요정이나 ‘ㅇㅇ클럽’ 같이 음습한 장소에 비할 나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서 9조원 달하는 자금지원을, 주무 은행 책임자의 우려표명에도 불구하고 정책결정자들이 강요했다는 사실이다.

부실기업의 문제는 시장기제에 의해 해결돼야하는 사항이다. 만에 하나 과거 정부주도의 산업화 시대에나 있었던 ‘정책금융’이 지금도 필요하다면,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복수의 대안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선정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집합적 의사결정이 가능하려면 핵심행정부가 민주화돼야 한다. 핵심행정부 의사결정의 이상형인 ‘내각정부(cabinet government)’가 구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행정 이원론이 준수돼야 한다. 행정(주무 국책은행의 수장)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기재부장관과 금융위원장)가 집행을 강요했다면, 이는 현대 국정운영의 규범을 위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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