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회> 날개에 숨긴 칼 18
‘실러’는 ‘희망 없는 사랑을 하는 자’만이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견주어 보면 현성애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여인이었다. 회사를 몽땅 들어먹고 거성자동차로 팔려간 채 이용만 당하는 자. 크리스 뱅글이란 거물을 낚기 위한 낚싯밥 노릇이나 하는 자를 위해 며칠 밤을 새워가며 튜닝설계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녀는 제 자신도 모르게 권도일을 사랑하는 중이었다.
‘도일 씨 엉덩이가 어떻게 생긴 줄 알아요? 크기는 얼마만한지 알고나 계세요?’
그녀는 튜닝카의 시트와 페달을 설계하면서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앞에서 보면 홀쭉한데… 옆에서 보면 볼록해요. 살찐 조선호박처럼 생겼다고요. 그리고 허벅지가 두 뼘 반이나 되니 시트의 슬라이딩 레버는 약간 낮추는 편이 좋겠지요?’
지금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권도일을 상상하며 그의 신체구조를 기억하는 중이었다. 줄자로 재지 않고도 정확히 그의 신체 치수를 짚어내기 위해서는 섹스 때의 기억을 충실하게 복제해야만 할 것이다. 충실한 기억의 복제를 위해서는 상상 속에서나마 그의 옷을 모두 벗겨내야만 했다는 뜻이다.
배꼽에서 가랑이 까지는 한 뼘, 배꼽으로부터 목까지는 두 뼘 길이여야 적당한데 권도일은 목까지의 길이가 두 뼘에 이르지 못했다. 배꼽이 유달리 높게 붙어있거나 혹은 상체를 심히 숙이고 있는 결과다. 그러니….
‘등받이 각도를 조금 세우고 스티어링 휠 연결 부위를 허브어댑터로 교체해서 계기판이 가려지지 않도록 할게요. 오빠, 쪽!’
튜닝 설계도면을 그리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허공에 입술을 내민 채 쪽쪽 거리는 모습을 보니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괴로울만도 한데,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애쓰는 중이니 행복하기도 했다. 원래 사랑의 고뇌처럼 달콤한 것도 없고 사랑의 슬픔처럼 즐거운 것도 없는 법이다. 사랑의 괴로움처럼 큰 기쁨도 없고 사랑에 죽는 것보다 더 큰 행복도 없다고들 하니…. 의학적으로 깊이 분석해보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낭만적인 정신질환인지도 모르겠다.
‘오빠의 치명적인 단점은요…숏다리라는 거예요.’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상상 속에서 벌거벗고 차렷자세로 서있는 권도일의 나신을 음미했다. 이 역시 충실하게 기억을 복제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는 숏다리의 길이에 맞추어 풋 레스트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원래 고속으로 코너링할 때는 상체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가급적 발을 넓게 벌려 체중을 시트 중앙에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숏다리를 넓게 벌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내친 김에 상체를 확실히 잡아주는 버킷 시트로 교체할 거예요. 훤칠한 롱다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니까요?’
중얼중얼, 투덜투덜…. 그녀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권도일의 몸을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겼을 때를 기억하며 그의 어깨넓이를 추정했고, 까치발을 들어 그와 입 맞추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의 키를 계산했다. 그의 목덜미를 입술로 핥던 기억을 떠올려 그의 목 길이를 계산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어 감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의 허리 사이즈를 추산했다.
‘나를 안았을 때 허리를 감은 손끝이 어깨까지 닿았으니…당신의 겨드랑이에서 팔 끝까지는 60센티미터일 거예요. 유온계와 전압계, 부스트압 게이지는 70센티미터 전방으로 옮겨놓을게요.’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한 번쯤 이토록 미쳐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그녀가 중얼거리는 혼잣말 속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여자의 말 한 마디에는 남자의 가슴이 저릴 만큼 진한 사랑이 농축되어 있는 법이다.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권도일을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다. 철저하게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번 랠리 경기에서 오로지 사랑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눈물겹기만 했다.
그러나 30여년 전의 주소가 적힌 명단을 들고 산길, 들길을 헤매며 1974년 산 치타를 찾아다니는 권도일은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치타를 찾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뛰어다니며 오뉴월 땡칠이처럼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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