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끝까지, 죽을 때까지 (26)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강유리가 즐겨 입는 은빛 크롬페이퍼 색의 미니스커트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추워 보이는 색깔의 치마였다. 하물며 스타킹도 신지 않은 채 드러난 늘씬한 종아리… 또한 맨발에 걸친 구두 위로는 허연 눈발마저 서걱거리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보는 외국 신사들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추워요. 감기 걸리겠소.”
두런두런 이런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간혹 은발의 할머니들은 자신이 목에 감고 있던 여우 털로 된 숄이나 카시미론 목도리를 전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강유리는 추위 따위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알게 모르게 더블재킷을 걸친 신사… 총지배인의 표정 위에 머물러 있었다. 목적을 지닌 여자로서의 교활함이 먹이를 노리고 수면을 가르는 백상아리처럼 꼬리만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 내기 거실 분 없나요? 저 아가씨가 나머지 열아홉 개의 볼 중에서 열일곱 개를 깡통 안에 넣겠다고 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손 들어주세요.”
비록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관광영어로 띄엄띄엄 말한 것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거침없이 손을 드는 사람도 없을 밖에.
“물론 불가능한 일인 줄 압니다. 하지만 이 아가씨가 자신 있다고 하니 내기를 걸어보는 게 어떨까요? 밑져야 본전!”
‘유리야, 밑져야 본전이란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니?’ 어쩌고 하며 백광돌은 계속 바람을 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강유리는 매끈하게 뻗은 다리를 석양빛에 부각시키며 신비로움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사각으로 비껴드는 석양빛을 잘만 이용하면 실루엣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쯤이야 누구라도 알 만한 사실, 고개 숙여 실루엣으로 어둡게 떨어지는 얼굴표정은 동양 여인의 단아한 몸매와 어울려 꿈속에서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을 상대로 내기를 거는 것은 큰 실례지요. 내가 다른 제안을 하겠습니다. 깡통 안에 몇 개를 넣든 개의치 않겠소. 결과야 어떻든 저 아가씨에게 오늘 저녁식사를 베풀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는 없나요?”
이크! 드디어 걸려들었군… 기대하던 대로 더블재킷을 걸친 총지배인이 앞으로 나서자 백광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래도 내기를 해야 재미있지 않을까요?”
“하하, 아닙니다. 저는 이런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흡족합니다. 마침 우리 호텔에 귀중한 VIP 손님이 투숙하고 계십니다. 올 시즌 경기를 마치고 잠시 휴가를 얻어 이곳에 오셨다고 합니다.”
“올 시즌 경기를 마쳤다면… 운동선수?”
“그렇습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십니다. 그 손님께서 저 아가씨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저녁식사에 초대해달라고 부탁하셨지요.”
이런, 이런… 백광돌과 강유리는 총지배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겨울동태처럼 바짝 얼어붙고야 말았다. 여태껏 벌인 일이 스스로 생각해도 기막혔기 때문이었다. 공자님 댁 앞에 책방 차리기, 호랑이 앞에서 웃통 벗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돼지 앞에서 코 까기… 더 이상 무슨 표현이 어울릴까? 그들은 창피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울상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허락해 주실 건가요? 오늘 저녁 7시, 스카이라운지 특실입니다.”
“…… 어, 그러니까…”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재미있는 시간 보내시고 이따 저녁 때 뵙겠습니다. 복장은 굳이 정장 차림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타이거 우즈께서도 편한 시간이 되길 원하시니까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타이거 우즈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천재 골프선수로서 무려 7년 반이나 세계 랭킹 1위를 고수했고, 3000억원이 넘는 돈을 골프로 벌어들였으며 전 세계 골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그런 불세출의 스타 아니던가.
<계속>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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