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19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다. 먹고사는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는 듯 했으나 국민의 기본권을 옥죄는 개발독재의 뒤안길에서 냉소적인 유행어들이 적지 않았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공약사항으로 내세운 ‘민생고 해결’은 “끼니를 채웠느냐”를 묻는 대중언어처럼 널리 활용됐다. 박정희 소장은 차지철 대위를 껌딱지 처럼 달고다니면서 쿠데타에 성공한 후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고 군부는 빠지겠다” 약속해 놓고는 이를 저버렸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경험했던 국민은 박정희 군사정권 세력들도 뇌물와 매관매직을 일삼자 이승만정권 공직자의 행태를 ‘구악’이라고 했고, 박통 측근들의 부정행위를 ‘신악’으로 갈랐다.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이 한창일 때 학생운동권은 김종필 협상단장을 향해 ‘저자세’라고 질타했다. 협상을 마무리한 김종필은 도피성 외유를 떠나면서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을 남겼다. 1965년 한일협상이 남긴 두 유행어는 시민의 일상 언어처럼 생활속에 널리 활용됐다.
1970년 3월 17일 밤 숱한 소문과 함께 피살된 정인숙 사건이 터지자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의미를 담은 ‘오빠조심’이 민초들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정인숙은 당시 출산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의혹을 받았던 정일권 국무총리와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씨는 숱한 권력자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어느 ‘오빠’가 사건의 주범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정씨의 아들은 1991년 정 전 총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다가 돌연 취하한바 있다.
‘근대화’는 뭐든 새롭게 하면 붙여지던 1970년 경제개발기 최고 유행어였다. 1973년엔 ‘근대화의 기수’라는 중학교 교과서가 나오기도 했다. 정권홍보자료가 사회교과서 한 챕터가 아닌 단일 교과서로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였다.
자유를 억압하는 개발독재가 계속되면서 ‘쨍하고 해뜰날’을 부른 송대관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해 가수왕에 올랐다. 서민들이 희망을 언급할 때 ‘쨍하고 해뜰날 오겠지’라는 말이 입에 붙어다녔다. 송대관은 이후 석연찮게 가수활동을 중단해 군부의 외압이 있었던게 아닌가하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이 본격화되면 1975년에는 ‘현지처’라는 말이 생겼고, 비슷한시기 학교에 촌지를 갖다바치는 어머니의 ‘치맛바람’도 회자됐다.
1978년에는 집권여당인 공화당 성모의원의 여고생 추행사건을 계기로 ‘영계’라는 말이 성인들은 물론 중고등학생 사이에도 들먹여졌다.
1977년 강남아파트 대단지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이듬해 최고 유행어는 ‘복부인’이 차지했다.
1979년 10.26 사태때 김재규가 박정희의 ‘껌딱지’로 불리는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을 겨누며 내뱉은 ‘버러지같은 놈’이라는 말과 전두환의 신군부가 부정축재자 수사를 벌일때 박정희의 최측근 이후락이 진술한 ‘떡을 만지다 보니 떡고물이 묻었다’는 말 역시 유사한 상황에서 널리 활용됐다.
함영훈 선임기자/abc@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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