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 붉은 길, 푸르른 마음 (30)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강유리가 비행기 복도로 나선 때는 소위 ‘ALT’… 애프터 런치 타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떠있는 동안 가장 무료하면서 야릇하다는 그 순간. 이니셜만 따서 읽으면 예술을 뜻하는 ‘아트’와 발음이 유사한데, 발음상 온 몸이 나른해지면서 예술적 감성이 풍부해지는 순간이다. 믿거나 말거나…

“와인 한 잔 더 주문할 수 있나요?”

강유리는 마침 복도를 지나는 스튜어디스에게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럼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바르삭도 있나요? 황금색 와인 말예요.”

“보르도 와인 종류로만 있을걸요. 1등 석 손님들을 위한 이탈리아 산 키안티 와인이 있긴 한데… 드릴까요?”

“어머나, 고마워요. 한 잔 가득 부탁드릴게요.”

“손님이 워낙 미인이라서 특별 서비스해드리는 거예요.”

스커트 옆구리를 찢은 절세미녀, 날아갈듯 한 유니폼에 올림머리를 한 스마일미녀… 늘씬한 두 명의 미인이 닭장같은 비행기 좌석 옆에 우뚝 서있는 모습만으로도 ALT에 돌입해 있던 승객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ALT 상태란 과연 어떤 상황일까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장거리 비행을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공항으로 나선다. 전날 싸놓은 짐도 다시 점검하고, 일정표와 여권, 크레디트 카드 등을 챙긴 뒤 짐을 맡기고, 보안수속을 마치고,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고, 공연히 들뜬 마음으로 면세점을 들락거리다가 겨우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그러고도 한동안 지루한 시간, 몸도 마음도 지쳐갈 때쯤 해서야 비행기는 금속성의 굉음을 토하며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여행의 시작일 뿐인데 사람들은 벌써 녹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비행기가 평형을 유지하자마자 기내식 점심식사가 무릎 위에 놓인다.

뭔가 빠진 듯한 기내식을 대충 먹고, 싸구려 와인이나 맥주를 주문해서 마시고, 공짜 커피까지 마시고나면 온 몸이 노곤해지고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서서히 젖어드는 환상…

‘이탈리아 남자들은 소매치기마저도 잘 생겼다던데…’ 대부분의 여자 승객들이 이런 환상에 젖어드는가 하면,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들은… 너무 예뻐서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겨진다는 페테르부르그의 미녀들을 떠올리며 사타구니를 긁적이곤 할 것이다. 물론 주책없는 노인들도 비아그라 한 알쯤 여분으로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그런 순간이 바로 ALT, 애프터 런치타임이라는 말이다.

식사는 마쳤지만 잠은 안 오고, 식후정리가 끝나지 않아 영화도 볼 수 없고, 좌석은 좁지만 아직 돌아다닐 수는 없고… 어정쩡한 이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일만한 퍼포먼스를 벌이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자, 주문하신대로 한 잔 가득 따라왔어요.”

찰랑찰랑, 자칫하면 흘러넘칠 만큼 가득 찬 와인 색깔이 곱기도 했다. 스튜어디스에게 와인을 받아 든 강유리는 신희영, 유호성이 앉아있는 비즈니스 석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복도 바닥에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었다. 8등신 미녀의 터진 스커트 옆으로 미끈한 허벅지가 드러나자 사방에서 그만…

‘아! 아!’ 하는 한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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